볼거리 먹거리 가득한 1913송정역시장을 지나다보면, 노오란 빛이 인상적인 가게 하나가 발길을 붙든다. 가게 이름은 ‘인생가게’. 그 앞에는 ‘책과 맥주를 파는 인생가게’라고 쓰여진 입간판이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다. 책과 맥주라니. 조금 낯선 조합이지만, 너무나 신선해서 곧장 가게 문을 연다.

‘인생가게’ 양쪽 노란 서고에는 책들이 빼곡하다. 뒤 너머에는 크나큰 테이블이 있어, 꼭 작은 마을 도서관을 연상시킨다. 정면 안쪽으로는 스크린이 설치돼 음악도 나오고 영상도 번쩍인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벽면 원고지에 크게 새겨진 질문 하나. “당신의 인생은 누구의 것인가요?” 가게의 아기자기함에 반해 가벼이 발길 했는데 진중한 물음이 예고도 없이 훅 하고 들어온다. 어쩌면 답이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본질적 질문이다.

강수훈 책방 대표는 “이 문장 하나에 인생가게의 존재 이유, 철학, 그리고 비전이 모두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저는 우연히 만난 책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봅니다. 충분히요. 어떤 인생이듯, ‘정답’ 이란 게 없는데, 사회는 모범답안과 같은 삶을 살도록 강요하죠. ‘이렇게 가는 것이 옳다’는 것,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처럼요. 이를 넘어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용기, 그러한 힘은 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인생가게는 다른 책방과는 조금 다르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를 책들이 테마별로 꽂혀있다. 시·소설·수필처럼 흔한 분류가 아니라, 저마다 인생의 고민들로 책을 나누어 뒀다.

‘회사원 격공! 이 마음, 내 마음?!’ 섹션에는 이 시대 모든 직장인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의 책들이 꽂아져 있고, ‘괜스레 생각이 많아지는 밤, 당신을 비추는 달 하나’란 이름의 책장에는 센치한 감정을 보듬어주는 어여쁜 책들로 빼곡하다.

이곳은 큐레이션 책방이다. 쉽게 말해 책방에서 ‘고르고 고른’ 책들을 꼽아 판매한다는 말이다. 책방이 단순히 책을 진열·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한다는 게 인생가게의 운영철학이다.

책방을 휘이 둘러보면, 이 같은 책방의 바람을 담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당신의 발길을 멈추게 할 책이 한 권쯤 있길 바랍니다’가 그것.

“책방 지기들과 함께 회의를 해요. 어떤 ‘밥상’을 차려놓을지, 책을 꼽는 것이죠. 우리가 차려놓은 것들 중 한명의 인생에라도 관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물론 긍정적으로요.”

이달의 ‘블라인드 도서’ 선정 회의를 하고 있는 강씨와 책방운영진들.

여기다 블라인드 도서 또한 색다르다. 블라인드 도서는 겉표지가 꽁꽁 포장돼 있다. 어떤 주제인지, 장르인지 깜깜이 속이다. 다만 책의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키워드는 몇 가지 제공된다. 이를테면 ‘엄마가 보면 좋을 책’이나 ‘2030년에는?’ 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이 같은 키워드만을 보고 책을 구매하거나 떠오르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블라인드 도서는 매월 6권이 선정되는데, 벌써 블라인드 도서만 사가는 팬도 여럿이다.

“인생가게에서 가장 공들 들이는 것 중 하나가 블라인드 도서 선정입니다.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서 ‘인생가게 블라인드 도서는 믿고 본다’는 평가를 받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죠.”

이곳이 문을 연 것은 지난해 7월이다. 출장 차, 또는 여행 차 송정역을 찾는 사람들이 ‘책맥(책+맥주) 한 잔’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공간을 꾸몄다. 기차를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 또는 목적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의 ‘책 문화’를 퍼뜨리고 싶었던 그다.

“책을 좋아합니다. 백수였던 시절 시립도서관을 매일 드나들며 책을 읽었어요. 어느 날 첫 번째 책장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그게 안 되니, 책 제목을 매일 읽으니, 이제 어디에 어떤 책이 꽂혀있는지 알겠더라고요. 책 속에 묻혀 살면서 책방을 하고 싶다는 게 버킷리스트에 하나 추가됐던 거죠.”

책을 좋아하는 그이지만, 사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그 성향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일도 즐겁다. 그에게 있어 한 사람은 한 권 책으로 읽혀진다. 이렇게 기자와 만나서 인터뷰하는 것 자체도, 책을 한 권 읽는 것과 같다 한다.

“책은 흔히들 간접경험의 장이라고 합니다. 책이 주는 이러한 경험들은 자신의 인생을 조금 더 주체적으로 이끌고 갈 수 있도록 그 발판이 돼주는 것 같아요. 제가 법대를 나왔는데, 법학을 전공했으면 가야하는 루트가 있잖아요.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든가 공무원 시험을 본다든가 안정적 직장을 갖기 위한 노력들이죠. 허나 책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여러 길을 소개해주는 것 같아요. ‘이런 길도 있어’라고요.”

주인장이 사람을 좋아하는 터라, 이곳 인생가게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인생가게에서 ‘큐레이션’한 책들이 섹션별로 꽂아져 있다.

오전 11시부터 늦은 8시까지 누구나 편하게 들러 쉬다 갈 수 있다. 독서·인문학 등 시민 모임은 물론 북 토크·강연회·금요일의 영화상영회 등 소통공간으로도 활용하는 것도 환영이다. 가게 안에 작은 간이무대도 마련, 책방음악회도 정기적으로 열어볼 생각이다.

“이곳을 열기 전, 송정역시장에 없는 게 뭘까 봤더니 문화공간이었어요. 책을 매개로 힐링을 선사하는 사랑방으로 꾸며나가고 싶어요.”

인생가게에는 지역에 대한 애정도 듬뿍 느낄 수 있다. 책과 어울리는 맥주는 담양에서 공수해 수제품이고, 현재 손을 보고 있는 카운터 맞은편 공간은 지역 아트상품을 진열, 판매할 작정이다.

강 대표는 인생가게와 같이 골목 골목에 자리한 개성 강한 책방들에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의 강세로, 동네 책방이 위기를 맞고 있지만 결국 ‘사람’과 가까이, ‘삶의 터전’에 밀착해 품어낸다면 그 자체로 강한 힘이 있다는 것.

그는 앞으로 인생가게가 전국으로 확산되길 꿈꾼다.

“현재 지산동 카페 ‘커피볶는집’에 숍인 숍 형태로 입점해 있어요. 카페 벽면 서고가 인생가게에서 큐레이션 한 책들로 꾸려진 것이죠. 이처럼 인생가게에서 비롯한 책들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과 만났으면 해요.”

최종 꿈은 역시 답을 찾는 것이다. 벽면에 크게 새겨놓은 “당신의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말이다.

“어쩌면 뻔 할 수 있는 질문에 답을 주는 공간이고 싶어요. 답을 주는 것이 어렵다면, 잠시 멈춰 서보는 곳이죠. 내 인생을 한 번쯤 되돌아보고, 고민하고, 또 미래를 그려보는 것. 그러한 생각들을 펼쳐 보이는 곳이고 싶습니다. 책방 인생가게의 풀 네임은 ‘인생을 생각하는 가게’ 이거든요.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책 한권이, 한 문장이 당신의 인생에 확 꽂혔으면 좋겠어요. 책을 만나기 전보다 더 아름답게, 더 긍정적이게요. 이곳에 온 누구나의 인생을 움직일 수 있도록 좋은 책들로 꾸며놓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