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 일손이 달리다고 해서 감 따러 갔다. 이파리 떨군 잿빛 감나무에 가지가 휘어지도록 붉은 감이 달렸다. 멋지다. 가을이 통째로 가슴에 안겼다. 좋은 풍경은 핸드폰이 아니라 마음에 담으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마치 내가 감 농사를 지은 것처럼 뿌듯했다. 장갑을 끼고 사다리를 챙겨 감을 따기 시작했다. 한참 감을 따는데 ‘뭐가 어드래?’ 큰 소리가 들렸다. ‘감 따고 있어요’ 보면서도 모르냐며 투덜거렸다. ‘뭐가 어드래?’ 내 귀가 만난 적 있는 북한 사투기가 또 들렸다. 북한에서 살지도 않았으면서 뜬금없이 왜 북한말을 하는지 갸우뚱했다.

한참 있다가 쫓아왔다. ‘머드러기만 따라고!’, ‘머드러기요?’, ‘굵고 좋은 놈만 따라고, 상품가치가 있는 놈만!’. 그제야 ‘머드러기’가 귀에 들어왔다. 아는 것만 들린다더니 모르는 말이 엉뚱하게 들렸었다.

쉬는 참에 핸드폰을 꺼내 찾아봤다. 열매나 생선 가운데 굵고 큰 것을 머드러기라 한단다. 새로운 낱말 하나 배우겠다고 ‘머드러기, 머드러기’ 하면서 부지런히 감을 땄다.

처음 느낌과는 달리, 멋진 가을은 목으로 뻐근하게 다가왔고, 뿌듯한 풍경은 팔이 저리도록 뒤엉켰다. 목 빠지는 줄 알았고, 팔 떨어진 줄 알았다.

감을 따기만 하면 끝난 줄 알았다. 조그마한 수레에 감을 싣고 울퉁불퉁한 감밭길을 지나야 했다. 행여 흠집 날까 100일된 아가 감싸듯 옮겼다. 창고에서 감을 닦고, 크기에 따라 옮겨 담았다. 내 허리는 곧추세우라고 자꾸 칭얼대며 다그쳤다.

컵라면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데, 어찌나 힘들었던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수다에 끼지 못했다. 그저 들었고, 그저 눕고만 싶었다.

사라지는 농촌 마을의 감은 이제 누가 딸 것인가, 귀농은 환상이 아니라고 느낄 때쯤, 낯선 말들이 들렸다. 우리의 논밭과 감나무들은 이미 배우기 시작했을 동남아 언어들이었다.

포장을 하고, 받을 사람 주소를 적어 기다리는 택배 차에 실었다. 남은 ‘부스러기’는 집에 가져가서 먹으라며 실어준다. 씻고 출발하려는데 도저히 운전할 힘이 없다. 가다 잠들 것 같았다. 마을회관에 가서 냅다 몸을 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 정치 평론가들이 나와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대통령 전용기 MBC 기자 탑승 거절, 오드리햅번 코스프레로 수다를 떤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어느 어르신 말이 귀에 들어왔다. ‘내가 왕년에~’라는 말에 ‘아이쿠 여기에도 꼰쇠(꼰대)가 있구나’ 했다.

자네 ‘시침’이라고 아는가? 옛날에 꿩 같은 새를 잡으려고 매를 길들였지. 그 길들여진 매를 산지니, 수지니라고 했어. 매 주인이름을 써서 산지니 꽁지에 매두는 것을 시침이라 하지. 뿔로 네모나게 만들었어. 산지니 수지니를 빼앗을 때 남의 시침을 떼고, 내 시침을 달지. 그것을 ‘시치미 뗀다’고 했어. 요새는 해놓고도 안 한 척할 때, 알면서도 모른 척 할 때 시치미를 뗀다고 하지. 시치미 떼는 일은 사실 주인을 바꾸는 일이야.

새 대통령이 기자를 비행기에 왜 안 태워준 줄 아신가? 그것이 시치미 떼는 일이여. 매 주인이 바뀌었는데 매가 주인을 안 알아주니까 주인을 알아봐라 하는 것이제.

그 말씀 뒤에 산지니 수지니를 궁에서 따로 관리하는 응방을 말씀하신 것도 같고.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시치미는 내가 주인임을 알리는 일이고, 시치미를 떼는 일은 주인을 바꾸는 일이구나. 아무리 농투성이로 살았어도 저 어르신은 얽힌 세상사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솜씨가 있으시구나’

어르신의 슬기로운 한마디가 정치평론가들의 며칠 수다보다 또렷하구나.

어르신은 머드러기의 삶이로구나. 부스러기를 얻어가면서 부스러기 같은 내 삶을 보았다. 이러다가 시치미 잊어먹듯, 농촌도 잊고 어르신의 슬기도 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