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당사자들의 피해 회복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가 자국민 피해 회복에 앞장서지는 못할망정 대법원 배상 판결에 따른 가해자 국내자산 압류 현금화를 막아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된 지 76년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진행 중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 이 문제는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을 수행하기 위해 인적·물적·자금을 강제로 동원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강제동원의 피해 유형은 크게 노동력 강제동원(노무자), 병력동원(지원병, 학도병, 징병), 군무원(군속, 군부), 위안부 등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반도 내에서 각종 명목으로 동원된 노동자 수는 연인원 600만 명 이상, 일본이나 전쟁지역으로 동원된 노동자 수는 139만 이상, 군인·군속으로 36만 이상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본으로 동원된 노동자는 최소 70만을 넘고, 일본군 성노예(종군위안부)도 적어도 10만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와 전후 보상 문제 해결을 위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양국은 식민지배 과거사에 대한 인식 공유를 이뤄내지 못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통치는 불법이며 추후 국제법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우리의 입장과 달리 일본은 대한제국의 동의에 따른 합법적 절차를 통해 한일병합 등이 이뤄졌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런데도 이 조약에 부속하는 ‘청구권협정’에서는 일본이 한국 내 자산 및 제반 권리를 포기하고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10년간 지원하는 대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내용이 담기는 타협이 이뤄졌다.

피해자 개인 배상 쟁점이 전면화한 것은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서 비롯됐다. 당시 대법원은 “청구권협정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철저히 부인했다”며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과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은 소멸 또는 포기된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청구권협정으로 배상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과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과 11월 각각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 명령이 나왔다. 역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가해 기업들이 배상 이행을 외면했다. 이에 피해자들은 법원에서 미쓰비시 한국 내 상표권과 특허권 압류 명령 결정을 받아낸 뒤, 2020년 9월 상표권과 특허권 매각명령을 끌어냈다. 손해 배상을 위해 상표권과 특허권을 현금화할 수 있다는 결정이다.

미쓰비시는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고 항소심 재판부가 이를 기각하자, 지난 4월 대법원에 재항고한 상태다.

대법원의 판결 마감시한이 다가오자 우리 외교부는 지난달 26일 대법원 담당 재판부에 사실상 판결을 보류해 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한 데 이어 윤덕민 신임 주일 한국대사가 지난 8일 “해법을 찾기 위한 외교적 공간을 마련하려면 현금화 동결이 필요하다”고 말해 논란을 부추겼다.

정부는 지난 26일 한일 외교부 국장급 회의를 갖는 등 막후 협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지만 근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난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간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양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본 측은 우리나라가 가해자 재산을 현금화할 경우 한일 관계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으나 이는 다분히 협박이다.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한 뒤 사과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가 아니겠는가.

우리 정부는 버티는 일본의 눈치를 보며 ‘대위변제안’을 검토하는 등 우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 안은 한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먼저 배상금을 지급하고 추후 일본 기업이 참여한 기금 등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안은 피해자 측의 반발을 산 것은 물론이고 향후 가해자에게도 동의를 얻기 힘든 방안이다.

강제동원 문제는 원칙과 법대로 해결해야 한다. 4년 전 대법원은 피해자 1명당 1억~1억5천만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본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우리 대법원을 하찮게 보는 것이며 대한민국을 무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