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 얼마 전 지인과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점을 찾았다. 코로나19의 규제가 완화된 때문인지, 아니면 그곳이 유명한 맛집이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음식점은 많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음식점에 도착한 손님은 곧바로 들어가지 못한 채 입구에서 번호표만 받고 바깥에서 기다리다 자신의 순서가 돼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평소 음식점에서 장시간 기다린 후 식사를 하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인지라 다른 곳을 가기로 마음을 먹고 발길을 되돌리는데 낯익은 그림이 눈부처에 잡혔다. ‘오징어 게임’이었다. 업소 측에서 손님의 지루함을 달래줄 요량으로 바닥에 그려놓은 모양인데 그 의도에 맞게 몇 명이 팀을 나눠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가 교집합을 이루며 그려진 선을 중심으로 외발뛰기를 하고 힘겨루기를 하며 결전을 벌였다. 제풀에 지쳐 넉장거리로 넘어져서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오징어 게임이 주는 정겨운 소란함에 끌려 스스로도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외발로 서서도 조금도 수비팀에 밀리지 않던 동네의 형이 있었고, 여자이면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기운을 쓰던 영희, 키 작고 몸피도 왜소하지만 민첩함으로 목적지를 발로 찍곤 하던 철수도 있었다. 영희와 철수 사이에서 밀어내기와 잡아당기기를 반복하던 나를 끌어낸 것은 식사 차례가 됐다며 손을 잡은 지인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인기라고 한다.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거액의 상금을 따기 위해 목숨을 걸고 벌이는 게임이 기둥 줄거리다. ‘오징어 게임’은 7080세대에게는 익숙한 놀이여서 더욱 친근감을 주는데 드라마 내용을 접하다 보면 유년기의 놀이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죽음’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죽었다’는 말은 유년기 놀이에서도 흔히 등장했는데 그 때의 죽음이 단순히 ‘게임에서의 제외’를 의미하는 과장된 표현이었다면 드라마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죽고 죽이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술래인 영희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난 후 움직임을 감지하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죽이는 모습을 보면 절로 진저리가 쳐진다.

드라마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삶의 현실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소득의 불균형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데다 코로나19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점도 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열풍 때문인지 텔레비전에서 생존 게임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내일의 가수를 꿈꾸는 이들이 노래 실력을 겨루는 경연이야 익숙한 것이지만 군인들끼리 페인트탄을 쏘며 죽이고 죽는 대결을 펼친다든지, 개그맨들이 코너를 만들어 재미 대결을 벌이는 등의 프로그램이 경쟁적으로 시작됐다. 심지어 배신과 거짓, 음모 등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치열한 생존 서바이벌 게임도 있다.

‘오징어 게임’이 현대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그려낸 것으로 호평을 받는 것처럼 다른 프로그램 역시 현실을 반영하려는 기획 의도를 갖고 있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적 지상주의’나 ‘승자 우선주의’만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순기능만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한 번도 메달을 따지 못하는 초등학생 수영 선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4등’에서 아들이 훈련 중 몸에 난 피멍을 보고도 외면하며 “아들이 맞는 것보다 4등을 하는게 더 무섭다”는 엄마는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은 오직 1등 만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결과 못지않게 방법이나 과정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우리가 즐겼던 ‘오징어 게임’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1등이 중요했다면 영희와 철수 외에는 누구도 그 놀이에 참가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놀이의 힘은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고 부대끼는 시간을 갖는다는 데 있다. 누군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피가 나면 닦아주며 놀이를 즐겼다.

균형을 잃은 지식이나 정보는 자칫 색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의 ‘오징어 게임’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