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파본 사람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마련이다. 건강한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가에게 몸이 아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체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삶과 사유가 투영된 예술 작업이 멈춘다는 의미여서 보통의 사람들보다 그 고통의 폭이 넓을 터다.

인간의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영역은 예술인이든, 예술인이 아니든 그 본질은 같을 수 밖에 없지만, 예술인은 몸만 망가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술이 멈춰선다는 의미다. 관리를 잘해서 건강을 되찾았다손 치더라도 공백으로 방치됐던 예술을 복원하기 위한 힘겨운 여정을 감내해야 한다. 한동안 화단에서 이름을 찾기 어려웠던 그 역시 큰 수술로 인해 예술활동이 멈춰서야 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고, 회복기를 가져가고 있지만 그동안의 공백을 복원하고 메꾸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예술가가 있다. 오히려 올들어 힘겹게 되찾아가고 있는 건강을 다시 망칠까 우려될 만큼 바쁜 활동을 꾸려가고 있다.

인터뷰 중 작품 앞에 잠시 선 정순아 작가

유년기부터 한국화에 진력해오다 8년 전 판화에 입문해 활동을 펼쳐온 전남 진도 출생 판화가 정순아씨(50)가 그 주인공이다. 동구 동명동 옛 농장다리 인근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을 지난 27일 오전 찾았다. 가까운 곳이어서 금방 찾을 수 있으려니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헤맨 끝에 겨우 그의 작업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을 빼꼼 열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자 ‘제12회 광주국제아트페어’(아트:광주:21·28∼31일 DJ센터) 출품 등의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가의 모습의 보였다. 막바지 작품을 마감 중이어서 한 5 분여를 기다린 끝에 그와 대면, 예술 인생 전반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지난 8월 양림미술관에서 ‘청담’(淸談)이라는 주제로 개인 판화전을 연 이후 조금 쉬었다 가도 되련만 그는 여전히 분주했다. 물론 개인전 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청담’의 유래부터 들려줬다.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정순아 작가

청담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때 관료들이 너무 잦은 교체로 내몰리자 교체 당하느니 차라리 세속을 벗어나 자연에 들어가 좋은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게 낫겠다는데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그 역시 이처럼 좋은 소리만 들으며 살아가는 마음으로 작업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향한다. 이런 연유를 가져가게 된 계기는 2년 전 어지럽고 떨리는 등의 증세가 자주 반복돼 검사를 한 결과 뇌에서 혹이 발견됐고, 그 혹이 신경을 누른 것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증세가 계속되자 큰 수술을 해야만 했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밝힌다. 이 2년의 시간들은 요즘 그를 더 깊이있게 사유하도록 만들고 있다. 인터뷰 중간에 말해줘서 안 사실이지만 그는 독서를 매우 좋아하고, 꾸준하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작가의 독서는 ‘청담’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역사적 서사가 숨겨진 단어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여겨졌다.

‘동행’

2년 동안 강제적 공백기를 갖고 난 뒤인 올해 그는 보란듯이 개인전 4회와 서너 차례 그룹전에 참여해 완벽하게 공백을 메꿨다. 그가 수술 이후 창작에 갈망이 컸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당장 ‘광주국제아트페어’가 끝나면 ‘고양국제아트페어’(11.4∼10)에 출품을 앞두고 있어 계속 쉼없이 작업을 해야 할 입장이다. 그 공백의 기간이 그를 개인전과 단체전에 좀더 욕심을 내게 한 이유였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의 변화를 반영한 증거로 읽혔다.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풍경)에 대해 더 내밀하게 관찰하게 된 자취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그에게 자연은 재발견의 대상이 된 듯하다. 수술 전후 자연은 더더욱 그에게 큰 존재가 된 셈이다.

“작가이니까 현실 속에 있는 것이겠지만 마음은 늘 자연을 향해 있고, 그 자연을 노래합니다. 가치관이 바뀌면서 양림미술관에서 선보였던 ‘청담’ 시리즈를 하게 된 거구요. 그래서 자연은 제게 하나의 삶이자 안식처라고 볼 수 있죠. 다시 말해 자연은 공존과 애증의 대상인 것 같아요. 가깝고도 먼 존재로서 다양한 감정을 안겨줍니다. 감정에 따라 무등산이 달라져 보이는 것처럼 자연은 많은 감정을 이입시켜준다고 볼 수 있어요,”

‘홀로 여행2’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국대회 수상 등 그림에 남다른 재질을 보여 중학교 때 홀홀단신 광주로 유학을 떠나올 만큼 미술에 깊이있게 몰입해왔다. 어린 나이에 광주로 유학을 오게 된데는 부친이 그림을 좋아해 그를 뒷받침해줬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오로지 미술을 위해 광주에서 홀로 살면서 미술공부를 한 까닭이다.

진도가 조선후기 남화의 거목 소치 허련(1809~1892)이 머물던 고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전교생이 수업과 별개로 한국화를 그리는 시간이 따로 있었다고 할 만큼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유년기부터 자연스럽게 미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이 뒷받침된 것이다. 이렇게 어린시절부터 한국화에 눈을 뜨게 된 작가는 당연히 한국화를 전공했고, 2013년 판화에 입문하기 전까지 한국화 전시만 4회를 열었다.

판화 입문은 그의 그림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한 계기가 됐다. 그리고 나서 벌써 판화로만 네차레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화가 압도적으로 긴 시간 동안 그의 삶이 됐지만 판화에 입문한 이후에는 판화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고 있다. 회화보다 훨씬 작업이 힘들지만 그가 작업이 어려운 판화를 하면서 견딜 수 있는 이면에는 ‘조각 칼맛’이다. 이 칼맛을 잊지 못해 한국화에서 판화로 말을 갈아탄 이유다.

‘벽이야기2’

“회화는 잘못되면 다시 고쳐 그리면 되지만 판화는 헛수고가 됩니다. 물감으로 찍으면 마르는데만 며칠 걸려요. 한동안 찍고, 파고 하다가 잘못 나오면 한달 간 벌였던 작업이 헛수고가 돼 버리구요. 그래서 판화는 한달에 한 작품 나올 둥, 말둥 합니다. 여기다 막상 잘 나올 것 같은 판화가 찍으면 잘 안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방문한 전날인 26일에도 한달간 작업한 것을 실패하면서 ‘이걸 내가 더해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늘 갈등 속에서 산다고 보면 되죠.”

작가는 회화의 경우 원작이 단 1점만 존재하게 되지만 판화는 찍게 되는 관계로 여러 점이 생산되게 돼 ‘희소성이 떨어지지 않냐’는 물음에 희소성을 잃지 않기 위해 작품당 5∼6장만 찍는다고 답했다. 김익모 교수(조선대)로부터 판화를 배운 작가는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결국 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결국 작가와 잘 맞았기 때문에 판화를 선택한 것이다.

‘벽이야기’

“판화가 저하고 체질적으로 맞았고, 조각 칼맛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또 고되지만 수행하는 듯한 느낌이 좋았죠. 페인팅과는 달리 잡생각이 안들더군요. 판화에서 느끼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어떤 희열감이 있어요. 언제까지 판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매력적인 칼맛을 잊지 않는 한 지속해갈 겁니다. 다만 내년에는 ‘황금 들판’ 시리즈를 테마로 반구상에서 좀 더 추상으로 나아갈까 생각 중입니다.”

이에 앞서 그는 한동안 ‘옥상가옥’ 연작(2018∼2021)에 몰입했다. 2018년 주택난이 심할 당시 집을 알아보고 다니던 작가는 우연하게 뉴스에서 한 남성이 자신은 “3억 가진 거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옥상가옥’을 작업했다. 겨우 집을 구하기는 했으나 이를 잊을 수가 없어 시사적 작업의 하나로 집중해 선보이게 된 것이다. ‘옥상가옥’은 집 위에 집을 얹는다는 뜻이다. ‘옥상가옥’은 2018년 시작했지만 올해로 대장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어서다.

끝으로 작가는 아크릴이든, 판화든 무엇을 해도 서정적 특징이 드러나는 등 한국화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들을 주위로부터 자주 들어왔다고 전제한 뒤 그려보고 싶은 그림의 지향점을 들려주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벽에 그림을 그릴 것인가, 붓이 무기가 되는 그림을 그릴 것인가, 사람들이 편안해 하는 그림을 그릴 것인가는 오로지 작가의 선택이죠. 시사성을 함의하고 있으면서도 집안에 어울릴 수 있는 그림, 즉 조화로운 그림을 해보고 싶은 게 꿈이에요. 그리고 내용적으로 한국적 추상 작업을 더 해볼까 합니다. 한국적인 미를 글로벌하게 반영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어요. 아울러 내년부터는 여건이 되면 서울에서의 활동을 늘려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