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 제니의 좌절과 우울은 잘 나가는 영화감독 정다희를 만나면서 더욱 증폭된다. 문제된 신경인지 회로에 부정적 요인을 제거하는 작업, 잘 나가는 자의 정보 매뉴얼을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 이를 향한 초인공지능의 치료 제안, 합당한 것인가. 어느 영역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인간이 초인공 지능에 종속되는 것은 아닐까. 공연은 매 장면 마다 이를 향한 질문을 다채롭게 던지고 있다.
당사자와 주변 인물의 반응은 다채롭다. 직사각형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관객은 양편에서 서로 마주보듯 이를 토론하고 반론하는 자세를 요구 받는다. 연극은 철저히 문제 이슈의 찬반 유무를 놓고 당혹, 반발, 동조, 수용 등 치열한 담론을 유도한다.
초인공지능의 지정 치유자가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자로 등극한다. 몇 년간 죽 쑤었던 칸의 정략적 의도는 아닌가. 어그러진 자본주의 영화산업의 명암이자 한계는 아닌가. 학과의 지표가 올라가니 좋은 일 아닌가. 대학 당국은 환호를 금치 못한다. 정부에서도 이 대학을 지정, 본받을 것을 촉구한다. 공연은 비본질 지표에 얽매인 어그러진 문명에 대한 성찰을 유발한다.
‘지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제니, 이전의 삐딱한 예술학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극도의 예를 갖춘 자, 친절과 사회성이 넘치는 행동이 반복 제시된다. 그의 모습은 완제품 로봇 이미지를 방불케 한다. 과장 희화와 반복 전략이 빛을 발한다. 거리두기 관극은 비판적 성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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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지정’ 장면(ⓒ 황선하, 제공_아시아문화원) |
과시자와 외면하는 자, 대쉬하는 자와 도망가는 자의 관계가 펼쳐진다. 상대 어깨 너머로 자신감 있게 손을 뻗는 자, 이에 반해 상대의 등을 향해 흐물거리듯 팔을 내 뻗는 무기력이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두 인물 사이의 기묘한 비틀림과 길항 상황이 연출된다.
그러나 조망과 보고의 과용, 쉼과 오락을 향한 놀이 콘셉트 부재, 순간 튀듯 불쑥 다가온 난해한 암호와 복선, 이로 인해 의미를 따라가지 못한 자에겐 질림과 지루함은 당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루함을 희석시킨 출품작 ‘박씨전’의 오프닝 멘트는 참신한 상상과 사유의 쾌감을 선사한다.
“살고 싶으면 달리세요. 그것뿐이에요. 앞의 풍경이 날 지나가죠. 그게 이 들판이에요. 할 수만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그 들판을 달리세요. 그냥 살아남으세요.”
달리기를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가. 나를 지나가는 풍경, 나를 지나가는 들판, 내 시선이 바뀌니 본질이 보이는 것은 아닌가. ‘컷’하며 달리는 활력 넘치는 제니의 모습, 색다른 인간 현존의 변신 가능성을 예고한다.
인공지능의 치유로 변화된 나, 행복을 누리는 자,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관객은 공연장 문을 열고 나가면서 자기 정체성 회복을 향한 철학적 사유와 반성적 쾌감에 젖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