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한 공론화 과정은 어렵고도 먼 길로 여겨진다.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수렴해 관련 정책 방향을 결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전 전문가들 역시 국민과의 사회적 합의를 비롯해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정책 결정의 주도권을 쥔 산업통상자원부는 소통이 아닌, 일방적 강행을 고수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 후유증은 곧장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파행’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정화 초대 위원장의 사퇴에 이어 일부 위원들도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며 또 다시 반쪽 공론화위원회가 돼 버렸다. 공론화를 주도해야 할 위원회가 파행을 거듭하면서 원전 인근 주민들 간 갈등만 심화되고 있다. 이에 그동안 진행된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리장부터 재검토위원회까지의 과정과 합리적이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책 결정 방안은 무엇인지 전문가 의견 등을 수렴해 알아본다.



△해법은 없고 ‘갈등’만 키운 재검토위

국내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는 사회적 합의나 수용성보다는 정부의 의지 또는 산업자원통산부의 의지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전문가들은 만약, 당초부터 환경시민단체와 지역주민이 적극 참여한 공론화가 이뤄졌다면 ‘좋은 공론화’를 이끌어 내고, 이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사례는 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산자부는 줄기차게 지역주민과 환경시민단체를 배제하며 공론화를 진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특히, 지역과 시민사회를 배제한 ‘중립적 전문가’로 구성된 재검토위원회(이하 재검토위)는 공론화 기간 동안 핵폐기물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기계적인 형식과 절차만 얽매여 있다. 이 과정에 전문가검토그룹에 참여했던 전문가들도 형식적인 운영을 비판하며 대거 사퇴했다. 결정적으로 재검토위를 1년 넘게 이끌어왔던 정정화 초대 위원장까지 공론화의 기본원칙을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지적하고, 이번 재공론화도 실패했음을 인정하며 중도사퇴했다.

실제로 정정화 초대 위원장은 사퇴 이후 “공론화 논의과정에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숙의가 필요한데, 공정하고 균형감 있는 전문가 그룹을 구성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탈핵시민사회에서 사퇴 요구와 보이콧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공론조사가 계속되기 힘들었다”며 “공론화위원 9명 중 본인을 포함한 3명이 더 이상 공론화가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털어놨다.

대한민국 방방곡곡 가져가라 핵폐기물 캠페인 기획단이 청와대 앞에서 핵폐기물 처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민국 방방곡곡 가져가라 핵폐기물 캠페인 기획단

△소통 기반 사회적 합의 이끌어 내야

특정 사안에 대한 공론화를 이끌어 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소통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 적이다. 그러나 현재 산자부와 재검토위는 이런 요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파행만 거듭하고 있다.

반쪽짜리 재검토위가 계속되면서 원전지역 주민들은 물론, 환경시민단체 등 사회적 갈등만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산자부를 비롯해 재검토위가 신뢰받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조건 정해놓은 정답만 찾아가는 식의 공론화, 모든 것을 공식화시켜 답을 맞추는 공론화가 이뤄지고 있어서다. 원전지역 주민들, 환경시민단체와 소통이 없는 공론화가 모든 갈등의 시작이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은 정정화 전 위원장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정정화 전 위원장은 “탈핵시민사회계를 포함해 사용후핵연료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이 포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위원회 재구성과 주관부처인 산자부가 아닌, 대통령 직속 또는 국무총리 산하기구에서 추진해야 중립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도 산자부가 일방적인 강행 행태를 버리고, 이해관계자, 시민단체, 원자력계 등 모두를 아우르며 목소리를 한 데 결집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녹색연합 석광훈 전문위원은 “영국, 미국 등 해외 선진국들은 기존의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이 관련 부처별로 방만하게 운영돼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는 반성 하에 독립적인 국가차원의 관리위원회를 설립하는 추세”라며 “해외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는 이러한 제도개혁의 결과물인데, 박근혜 정부나 현 정부 모두 방만한 관리체계를 방치한 채 공론화의 겉모양만 모방하면서 헛발질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은 “현재 재검토위와 주관부처인 산자부는 준비단의 건의사항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했고, 결국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며 “정정화 전 위원장이 사퇴하는 상황까지 맞았지만 산자부는 불과 6일 만에 위원장을 재선출하고 강행했다. 국정과제인 사용후핵연료 재공론화가 매우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꼬집었다.

김명자 전 환경부장관은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은 사회과학적 난제다. 복잡하고 민감하고 불확실하고 사회적으로 가치가 충돌하기 때문이다”며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정부의 역할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브레이크 없이 자동차를 운행할 수 없듯이, 반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되 정책의 최종 책임은 국민으로부터 국정을 위임받은 정부의 몫이다”고 말했다.

안재훈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국장은 “공론화도 중요하지만 지금 현실이 어디 있는지를 정부나 전문가가 정확히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며 “장기적인 로드맵을 투명하게 제시하고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