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은 제주 4·3사건 토벌을 위한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전남 동부권 일대를 점거한다. 여순사건의 시발이다.

초기 진압작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정부 진압군은 민가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통해 반란군 협력자를 색출하는 등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이 무수히 희생됐으며, 반란 진압 이후에도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을 비공개 군법회의를 통해 실시하는 등 공권력에 의한 무법적인 폭력이 횡행했다. 여수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으며, 여순사건 후손들을 오랜 시간 연좌제란 올가미로 묶어놨다.

어느덧 72년의 세월이 흘렀다. 통한의 시간이 흘렀건만 국가차원에서 그날의 진실규명과 피해자 보상 문제는 지금까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과 뗄 수 없는 ‘쌍둥이 사건’이다. 4·3사건은 20년 전에 벌써 특별법을 제정해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여순사건은 초보적인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여전히 묻혀있다.

올 해는 다르다. 올 1월20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있었던 재심 선고는 사법부 차원에서 여순사건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 주문이 내려졌다. 72년전 내란 및 국가문란 혐의로 기소돼 처형당한 장봉환 씨에 대한 재심이었는데, 재판부의 판단은 ‘무죄’였다.

국가권력이 민간인에 대한 불법·위법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판결의 핵심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례적으로 ‘여론(다 하지 못한 이야기)’을 붙여 정부와 국회에 촉구했다.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 사건과 같이 고단한 절차를 더 이상 밟지 않으시고.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어 그 절차를 통해 구제받으실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랍니다.”

그간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에 대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국회에 첫 발의된 이후 2011년, 2013년에 이어 지난 20대 국회까지 네 차례 발의됐으나 보수 정부와 보수 정당의 미온적인 태도로 심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지난해만 해도 당시 정인화·주승용 의원 등에 의해 대표발의된 특별법이 논의되는가 싶더니 상임위 배당 문제를 놓고 또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폐기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이번엔 특별법 제정에 대한 전망이 매우 밝다. 지난 7월 발의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의 심사를 앞두고 있다. 상임위만 넘어서면 국회 본회의 통과도 시간문제다. 이 특별법에 대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국회의원 절반이 넘는 152명이 이미 찬성 의견을 표명했다. 소관 상임위인 행안위와 법사위 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어서 어느 때보다 상임위 통과 전망도 밝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지역민들의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지난 19일 구례 현충원에서는 전남도 주관으로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해 여순사건 합동위령제를 갖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김영록 전남지사는 추도사에서 “극심한 이념대립과 잘못된 국가권력이 빚어낸 우리 지역의 큰 아픔이지만 72주기를 맞은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수에서도 여순사건 희생자 합동 추념식이 열렸다. 특히 여수 행사는 순직 경찰 유족들이 참석해 72년 만에 처음으로 민·관·군·경이 모두 모여 추념식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지난 1월 사법부의 여순사건 피해자 재심 최종 판결에서도 특별법안의 필요성을 인정한 만큼 정부와 국회가 앞장서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순사건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다. 우익이나 좌익 어느 것에도 서지도, 설 수도 없었던 많은 양민들의 목숨이 권력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됐던 뼈아픈 역사이다.

과거를 정리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올해 안에 특별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국회 상임위 활동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 또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역사의 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