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출신인 박태건 시인이 등단 25년만에 첫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를 모악 시인선 열아홉번째권으로 펴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일상의 풍경에 사유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에 이름을 지어주’(‘짓다’)듯 존재의 정체성을 꾸준하게 길어 올린다. 시인의 시야는 넓다. 일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시적 사유를 감행한다. 일상의 소소한 풍경에서부터 현재적 자아의 탐구에 이르기까지 시적 영역이 넓다는 의미다.

‘기를 쓰고 도망가는/기억이 가는 데까지//상처가 끝나는 데까지/가서 데려 와야지//바퀴는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상처의 알리바이가 된다’(‘상처의 무늬’ 일부)거나 ‘지금의 나와 이십 년 전의 내가/이열종대로 광주 간다//걸어갈수록, 활처럼 휘어지는/여름, 밤, 길//메타세콰이어는 한 점의 과녁/길 아닌 길을 향해 간다’(‘메타세콰이어의 밤을 걷다’ 일부)라고 노래한다.

그의 시적 촉수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가리지 않고 가닿는다. 광주에 가닿았다가도 자신의 삶의 상처에 가닿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 시편은 삶의 이면에서 발견한 격정이 노정된다.

또 ‘도마는 흉터가 사인이다/도마의 사인을 만지면/가슴 깊숙한 곳이 서늘하다/칼을 치면 도마 안에서 뭔가/튀어나올 것만 같다’(‘도마’ 일부)거나 ‘말을 버린 것들은/혀부터 단단해진다/나도 저 나무껍질같은 지느러미 하나 갖고 싶어서/산의 정수리를 쓸어내리는 겨울바람에/눈을 부릅뜬다’(‘황태라는 나무’ 일부)라고 읊는다.

도마는 늘 흉터를 달고 사는 삶이 놓여있는 곳이다. 시인이 딛고 있는 일상은 아직 표출되지 않은 내면의 상처들이 놓여져 있고, 겨울바람을 피하지 못한 현시대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진행 중이다. 시인은 어쩌면 지느러미 하나 돋은 기억의 한 가운데 막 발을 떼고 있는 듯하다.

이번 시집은 ‘물의 배꼽’을 비롯해 ‘저 환한 빛, 물결을 일으켜’, ‘거대한 뼈들의 무덤’, ‘회상은 부정의 품사겠지요’, ‘K의 그런저런 문제’ 등 5부로 구성, 25년의 시간이 투영된 55편의 작품이 실렸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한양대 국문과)는 해설을 통해 “자신이 겪어온 삶의 순간을 현재로 끌어오면서 신생과 소멸, 삶과 죽음, 충일함과 비어 있음, 흐릿함과 선명함 등 상반된 속성들이 시 안에서 한 몸으로 결속하는 순간을 찾아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삶의 불가피한 역설적 함의를 집중적으로 사유하고 삶의 밑바닥에 어김없이 소용돌이치는 심미적 격정을 형상화해나간다”고 평했다.

박태건 시인은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시와반시’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 저서로 산문집 ‘나그네는 바람의 마을로’와 그림책 ‘무왕이 꿈꾸는 나라’, 장편동화 ‘왕바위 이야기’ 등이 있다. 원광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신석정 문학의 탈식민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안문화연구소에서 지역문화연구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