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라는 한인촌에 머물면서 조선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단한 지위를 가졌거나 부자들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그 길을 묵묵히 가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겉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다. 허름한 판잣집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그들의 가슴엔 조선 독립이라는 강물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본문 41∼42쪽 일부)

위 지문처럼 일제 강점기 고려인의 삶과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청소년 역사소설이 나왔다.

어두운 시대를 건너온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청소년의 시선에서 풀어내는데 주력해온 전남 강진 출생 김미승 작가가 2년만에 나라를 잃고 눈 시린 바다를 건너야 했던 디아스포라, 러시아 동쪽 끝 사할린에 첫발을 디딘 고려인들을 호출하고 있는 세번째 청소년 역사소설 ‘검정 치마 마트료시카’(다른 刊)가 그것으로, 조선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그리고 고려인 2세인 딸을 주인공으로 해 스토리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검정치마는 조선 소녀를 상징하는 것이고, 마트료시카는 러시아 여성을 상징한다. 시간 배경으로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해방까지로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 있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청소년 소설이자 역사 소설 ‘저고리 시스터즈’를 펴내 주목을 받았던 저자는 이번 청소년 역사소설에서 일제 강점기 러시아에서 살아야 했던 고려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 김미승 시인

‘저고리 시스터즈’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이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 시스터즈’의 멤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구상을 하게 된 반면, ‘검정 치마 마트료시카’는 러시아 혁명가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알렉산드라와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노동자 김윤덕 옹으로부터 착상을 얻어 집필하게 됐다. 저자는 2018년 8월4일부터 8일까지 사할린 한인협회 초청으로 그곳을 역사탐방하면서 페허의 한 탄광 언저리에서 거주하고 있던 당시 95세의 김윤덕 옹을 만난 바 있다.

조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하바롭스크의 학교를 졸업한 열다섯 살 쑤라(알렉산드라 세묘노비치 김)의 모습 속에 김알렉산드라의 꿋꿋함이 담겼고, 소년 탄부 김현도의 석탄물이 든 손끝에서 김윤덕이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이 청소년 역사소설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용기있게 살아가는 소녀 쑤라의 성장소설이자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오늘까지 이어지는 역사 이야기로 이해하면 된다.

줄거리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쑤라가 등장한다. 쑤라는 러시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등상을 받지 못하지만, 철도국 통역관인 아버지가 직접 만든 ‘검정 치마를 입은 마트료시카’를 졸업 선물로 받는다. 블라디보스토크 여자사범학교에 진학할 꿈을 꾸며 마음을 다잡지만,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풍파가 인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발각돼 사할린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사할린 망향탑에서 포즈를 취한 저자

쑤라는 홀로 길을 떠나 사할린의 가와카미 탄광촌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고된 노동과 멸시 속에 살아가는 현도를 비롯한 조선인들을 만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차오르는 뜨거운 분노와 조선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등 밀도높은 심리를 그려간다. 작가는 역사탐방을 다녀온 뒤 6개월 후 김윤덕 옹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필을 서둘렀다. 기획과 자료수집, 그리고 집필 마무리까지 1년 동안 작업에 매달렸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혁명가이며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알렉산드라와 막장을 뚫고 피어난 억새풀같은 김윤덕 옹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트료시카’를 떠올렸고, 러시아 전통인형인 마트료시카는 뚜껑을 열면 똑같은 모양의 인형이 여러 개 들어 있어 마치 여러 명의 자신을 품고 있듯이,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이는 우리 청소년들도 쑤라처럼 자신을 믿고 용기를 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김윤덕 할아버지(앞줄 우측)와 함께 한 저자(앞줄 좌측)

김미승씨는 “한인 1세인 김윤덕 옹은 탐방 때 95세였다. 연로하신 연세에도 강제징용 당시의 상황과 해방 후 귀국선을 기다리며 무국적자로 살아야만 했던, 사할린 동포들의 가혹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디아스포라가 돼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려야만 했던 사할린 한인들,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기억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부끄럽고 슬픈 역사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김미승 작가는 2000년 계간 ‘작가세계’에 시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 저서로는 청소년 소설 ‘저고리 시스터즈’, 2015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된 ‘세상에 없는 아이’, 시집 ‘네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와 ‘익어 가는 시간이 환하다’, 동화 ‘잊혀진 신들을 찾아서, 산해경’, ‘서방바위와 각시바위’, ‘상괭이와 함께 떠나는 흑산도, 홍도 여행’, ‘소곤소곤 설화모리’(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