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 모라토리엄’이 사형제 폐지 여부를 다시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렸다. 찬반 논의를 보면서 찬성과 반대를 따지기 전에 살펴야 할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에 몹시 안타까웠다. 찬반 논의 이전에 하나의 현상에 대해 한 사회가 갖고 있는 시각의 성격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 시각은 하나의 사건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문제들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가해자들의 사회’다. ‘피해자의 시선과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시선과 입장’이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다. 가해자들이 비빌 언덕은 사방에 있지만, 피해자들을 위한 배려와 보호 장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가해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고 선처를 받는 모습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고, 피해자들이 상처와 피해에 대해 위로를 받고 보상을 받는 풍경은 ‘가물에 콩 나듯’ 발견되는 희귀한 풍경이 되었다.

‘미투’ 사건 피해자들의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과 대구에서의 집단성폭행, 광주에서의 집단폭행 사건에 대한 분노가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피해자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와 가해자들에 대한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에게 ‘선처’와 ‘교화’가 선물로 주어지는 동안 피해자들에게는 고통과 절망이 주어지고 있는 데고 한국 사회는 눈을 감고 있다.

최근 몇몇 행동 때문에 관심이 집중된 ‘워마드’도 출현 배경을 살펴야 한다. 남성위주의 사회적 시스템과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다면 출현하지 않았을 커뮤니티다. 극단적 행동은 경계해야 하지만, ‘워마드’가 보여주는 행동들이 ‘반향(反響)’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반대편에 그만한 크기의 가해자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문제의 근원이 사라지면 반향도 사그라질 것이다.

‘사형제 모라토리엄’ 논의는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 대해 사회적 보호와 배려가 있었는가를 살피고 나서 제기됐어야 할 문제다. 사회적 합의든 개인적 합의든 합의가 필요한 사건이나 사안에는 언제나 상대가 존재한다. 지금의 사형제 폐지 논의에는 가해자와 제3자인 정부만 있고 정작 있어야 할 피해자들의 자리가 비어 있다. 기이한 일이다. 누군가가 싸움을 벌였는데, 갑자기 두들겨 맞은 사람이 사라지고 경찰과 가해자가 마주 앉아 용서를 하느니 마느니 설전을 벌이고 있는 것 같은 풍경이다. 어떤 문제든 사회적 동의의 출발점은 피해자에게서 출발해야 한다. 현재의 사형제 모라토리엄은 피해자의 시선이 결여되었다.

사형제 폐지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여러 이유를 든다. 국제적인 흐름을 말하고, 정부가 인간을 단죄하여 생명을 빼앗을 자격이 있는 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사형제가 범죄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국제적인 흐름은 유럽 국가들의 보편적 인권 수준과 눈높이를 맞추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시선에 형식적으로 높이를 맞추는 것이 국민들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보다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눈높이를 맞추어서 살인사건이 줄어든다면 백번이라도 찬성할 일이다. 국가 권력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도 되느냐는 물음은 우매하다는 욕을 듣더라도 단순하게 한 번 뒤집어 묻고 싶다. 그럼, 범죄자는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도 되는 권리가 있는가?

실효성? 1997년 12월 이후 사형이 실시되지 않았다. 지난 21년 동안 사형제는 존재하지 않은 제도나 다름없었다. 그 기간 동안의 범죄 추이를 시행되지도 않은 제도의 실효성과 연결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공교롭게도 1997년 IMF 사태가 발생했고, 한국의 경제 환경과 사회 환경은 중산층 몰락과 극한경쟁 환경으로 바뀌었다. 강력 범죄가 늘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한 사회가 갖고 있는 사회적 시각은 그 사회를 규정하는 것을 떠나서 미래의 모습까지를 결정한다. 젊은이들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기회만 되면 나라를 떠나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가해자가 득세하고 독점하는 정의롭지 않은 ‘가해자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영웅이 존재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라고 했다. 국민청원은 피해자들의 절규가 만들어낸 영웅이다. 피해자들이 법이 아닌 다른 채널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 풍경이다. 논란이 되는 정책은 그 풍경을 바꿀 수 있어야만 명분이 있다. ‘평화를 원하면 정의를 소중히 하라!’는 고대 서양의 경구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