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무수히 걸려있던 온갖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일제히 사라졌다. 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반도 남쪽은 긴 끈으로 연결된 설치 미술을 보는 것 같을 것이다. 각각의 다양한 색채와 온갖 말의 성찬까지 곁들여진 현수막이 전국 곳곳에 내걸리니 현대 미술의 그 어떤 설치 미술보다 규모가 크고 극적이다.

선거기간에 SNS상에서 난무하던 격려와 상처를 주는 언어들이 뒤죽박죽 섞여있어서 핸드폰을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고 살던 사람들이 다시는 못 볼 요량으로 갈라져서 상처로 남았겠지만 이제 선거는 끝났다.

이번에 민의의 선택을 받아 당선된 분들은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권력을 쥔 다음부터 신념이 바뀌는 경우를 국민들은 너무 많이 보아왔다. 당선은 권력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처음 품었던 정치적 신념으로 국민들 속에서, 국민과 함께 흔들림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초심을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정세와 정치적 변화가 끊임없이 요동치는 나라이다. 당선자들은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 앞으로 여러 번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향한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어떠한 유혹 속에서도 변함없이 초심으로 굳건히 걷는 사람만이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소용돌이치는 시간을 뒤로하고 조용해진 일상으로 돌아와 우리들의 삶에서 맺어진 수많은 관계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창공에 떠있는 헤아릴 수 없는 별 중에 하나라도 질서를 어기고 이탈하면 우주는 괴멸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파탄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질서만이 능사이다. 질서는 엄격하지만 자유와 평화를 보장해주는 장치이며 그 바탕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배려가 깔려 있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질서는 강요받은 질서이고, 강자만을 위한 질서로 언젠가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며칠 전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세계적 경제학자 조지프 스타글리츠 교수와 2015년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그리고 존로미 예일대 교수가 한국에 다녀갔다. 석학들은 강연에서 이구동성으로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눈 앞에 두고 있지만 많은 국민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부와 정보의 집중으로 생기는 빈곤과 무관심으로 인한 소외계층의 증가는 우리사회의 올바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해치게 되고 이를 방치하면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기회가 균등하고 분배가 정의로울 때 우리사회가 건전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요 몇 년 동안 우리나라는 역사에 남을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 숨죽이며 무관심으로 지내는 계층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외받는 곳이 예술분야이다. 요즘은 문화가 선도하는 시대이다. 문화의 정점이 예술인데, 문화는 드러나 있지만 전문예술 분야는 고사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월드컵 열기가 휩싸여 있는 러시아는 그동안 여러 번의 정치적 변혁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민들은 그들의 삶속에서 예술을 사랑하고 향유했다. 그래서 러시아는 수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리도 비록 요동치는 정국이지만 시민들의 삶속에 예술이 깃든다면 예술은 소외받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영혼을 움직이게 하고 잠들어 있는 감성을 일깨워 준다. 그러한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큰 행운인 것이다.

선거가 끝난 후 이제는 민의의 선택을 존중하고 서로 화합하며, 우리 모두는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생에 충실해야 할 때이다. 햇살이 뜨겁다. 비가 기다려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