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2014년 작업해 발표했던 ‘통일염원도’ 속 글귀다. 눈과 귀에 익은 세대도 있겠지만 그에게 이 구호같은 글귀는 미술인생의 한 가운데를 관통해 왔고, 여전히 관통하고 있다. 그만큼 민중미술의 화두는 그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다. 그는 대학 때부터 민중미술운동을 펼쳐왔다. 이처럼 민중미술을 해온데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회적 역할 관계 속에 세상과 소통하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발돋움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 차원에서 선택한 것이다. 미술작품 최초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됐던 전력의 장본인인 민중화가 이상호씨의 이야기다.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인 1987년 전정호 작가 등과 공동제작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로 구속 수감됐다. 수감만 된 것은 아니다, 심각한 고문이 그를 뒤따라왔다. 지금도 당시 후유증은 트라우마로 그를 괴롭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처입은 몸과 마음의 평정심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의 열정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이런 그가 그림을 시작하게 된데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다. 초등학교 때 따돌림을 당하면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영암 삼호에서 광주 큰아버지 댁으로 옮겨와 지냈다. 물 설고 낯선 광주에서의 생활은 문득 혼자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창밖을 보면서 고립감을 떨어내기 위해 수채화를 그리곤 했다. 외로워서 그림을 그린 것이다. 부친이 양조장을 운영해 그림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내내 미술을 놓지 않았다. 미술은 어린 그에게 하나의 구세주였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목포고로 전학하게 됐고, 그때부터 화실에서 석고 데생과 수채화 등을 익히며 미술을 하나 하나 깨쳐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 미술대학에 진학한 그는 엄혹한 부조리의 시대 투쟁의 길로 접어든다. 대학 1학년때인 1984년 전정호 작가와 미술패 ‘땅끝’을 결성해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만장과 플래카드, 깃발, 판화, 걸개그림 등 시위에 일조할 수 있는 그림 작업을 전개해 투쟁의 선봉에 섰다. 1980년대는 걸개그림이 민중미술의 꽃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민중미술에 눈 떴을 뿐만 아니라 당대 민중미술에 대해 뚜렷한 좌표를 정립할 수 있었다.
“걸개그림을 통해 전두환 군부독재가 물러난다면 1000장이라도 그리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미술운동을 정립한 시기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현대사의 큰 족적으로 기록될 남북정상회담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봅니다. 고문 등으로 인해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것도 민주화운동의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지금은 치유가 됐죠. 모두 인생의 한 장면이 아니겠어요.”
민중미술을 하는 동안 함께 작업하기 때문에 연대하고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는 그는 작업해 제작했던 만장이 시위현장에서 함께 할 때 ‘우리도 무엇을 했다고 생각이 들어 보람을 느꼈다’는 전언이다. 이같은 활동은 대학 4학년 때까지 계속됐다. 1980년 같은 시대를 감내하며 민주화를 일궈놓았지만 현시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인간성 파괴 등 휴머니티 상실의 시대에 맞는 민중미술의 방향성에 대해 잊지 않았다. 자신이 내면에 숨겨둔 이야기들을 하는 동안 갑자기 화가 솟구쳐 오른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다고 논리력을 잃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분명하게 끌고 갔다.
“여전히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 상호방위조약 폐기, 군작전권 회수 등 이런 과제들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사람들의 감회나 느낌 만큼 저도 느껴야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이같은 굴곡진 조항들 때문이죠. 지금은 기쁠 때가 아니라고 보는 이유예요. 아이러니하게 미국 자신들은 핵을 갖고 있는데 자기들도 핵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평화협정이 아니겠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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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인쇄물을 핀란드 ‘히압’의 큐레이터 옌니 누르메니에미에게 전달한 이 작가. |
“저는 화가로서 반외세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이에요. 반외세 통일운동을 해야 한 민족이고, 한 핏줄인 남북이 함께 할 수 있어요. 이산가족들이 살 수 있도록 DMZ에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이산가족들이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아울러 올해 어렵더라도 차후 광주비엔날레 때 평양학생들이 광주로 수학여행을 와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와서 비엔날레를 함께 관람하면 좋겠죠. 이것을 현실화하려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보법 7조1항(찬양 고무)과 같은 악법 혹은 독소조항 하나라도 폐지돼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민중미술운동에 진력해온 그에게 변화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시작됐다. 1993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진행,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하나로 모아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 고려불화 전시를 관람한 뒤 큰 감화를 받고 탱화에 발을 들여놓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예능보유자로부터 밑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도 했지만 거의 모든 것들을 독학을 통해 터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탱화 중에서 그가 해보고 싶은 것은 ‘감로탱’이라고 들려준다. 감로탱 하단에 민중의 삶이 전개돼 있어 더욱 매료됐다. 평화운동을 펼쳤던 평화운동가 고 정의행 선생의 소개로 1997년 선덕사 후불탱화를 제안받아 작업하면서 민중미술 뿐만 아니라 탱화도 작가의 중요한 미술작업으로 자리매김됐다. 그때 그는 고려불화 형식으로 백두산이 있는데 그곳으로 부처가 강림한다는 통일염원을 담은 탱화를 완성했다. 이 탱화작업이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간간이 제안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그는 탱화 작업을 한다. 나머지는 자신에게 미술적 원류였던 민중미술 작업에 집중한다.
생각과 말, 그림이 똑같이 일치한다는 그는 동학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의병, 6·25한국전쟁, 4·19의거,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의 역사를 한데 품는 감로탱에 향후 6∼7년 동안 매진할 계획이다. 이 작품이 완성되면 백양사 성보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에서 20여점을 출품해 선보이고 있는 초대전 ‘연필로 그린 부처님 이야기’(2∼30일)에 대해 설명했다. ‘지옥도’와 ‘약사여래도’, ‘도솔래의상’ 등을 선보여 무각사를 찾은 불자와 방문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대 은사님이었던 황영성 명예교수의 소개로 청학 스님이 받아들이면서 전시가 성사됐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팠는데 이번 전시를 본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 때문에 많이 호전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중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고 있다는 그에게 계획을 묻자 통일과 남북미술공부에의 바람을 내비쳤다.
“요즘에는 민중이 아니라 민중민족이죠. 민중민족미술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남북정상회담도 열린 마당이라 통일을 바라보면서 남북이 어떤 소통을 해나가는가 유심히 지켜볼 것입니다. 예술도 분단돼 있는 만큼 하나됨을 위해 어떤 강좌를 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분단 이전 미술과 현재 ‘남북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강좌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