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진로, 즉 나아갈 길을 고민한다는 것은 평생에 걸쳐 가치관을 정립하고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이므로 청소년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다.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이 담보되던 시대가 지나고,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자기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이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물음은 불확실한 세상에 던져진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운명 같은 숙제이기도 하다.

진로가 삶의 총체적 설계라면, 진로교육은 개인이 삶에 있어 필요한 생애역할, 평생학습, 일, 여가 등에 참여하는 것을 배우고 준비하는 학습경험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직업을 선택하는 교육을 넘어 청소년들이 삶의 긴 안목을 갖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며 자기 길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학교 진로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A고등학생은 “학교에서는 꿈을 빨리 찾으라고 하지만 꿈을 탐색할 기회는 일 년에 서 너 시간 남짓. 매년 비슷한 강사들이 와서 자기 직업에 대한 설명과 고충만 이야기하고, 학교에서는 학교생활기록부 채워야 한다며 그 수업에서 느낀 점과 배운 점을 적어서 내라고 해요. 심지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진로 수업도 자신의 꿈과 관련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고 하거나 직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과제를 하라고 해요.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머리로 꿈을 찾으라고 재촉하죠”고 말했다.

학교 진로교육은 일종의 매칭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자기이해 차원에서 개별 청소년의 적성과 흥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검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활용해 전공과 직업 유형을 매칭한 결과를 알려준다. 검사 도구를 통해 자기이해와 진로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과와 직종을 연결해주는 게 핵심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주기적으로 검사를 진행하는데 직업 적성, 직업 흥미도, 직업 가치관, 진로 성숙도 등 같은 검사를 반복해 시행한다. 적성과 흥미가 계속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변화의 양상을 발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매칭된 결과만 알려줄 뿐 다음의 진로탐색 과정으로 연결해 준비하는 것은 결국 청소년 개별의 몫이다. 이후 과정에 대한 별도의 안내나 지원 없이 학교생활기록부에 매칭 흔적만 남겨지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매칭시스템은 진학과 취업 준비의 일환으로 세팅된 기획에 불과하다. 적성과 소질을 파악하는 것은 그 두 가지 트랙에 귀결돼 전형적인 준비 과정에 포획되고 만다. 그리고 그 경로를 이탈하거나 다른 경로를 구성하고자 할 때 자기 진로를 이해할 만한 근거나 진로에 참고할 만한 정보나 자료는 없다. 따라서 검사 이전에 우선 필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경험과 탐색의 다양한 기회다.

다양한 직업을 소개하고 그 일을 하는 청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출연자는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일하는 도로정비공, 미용사, 신용금고 행원 등이었다. 그 청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고등학생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들은 하나같이 “지금 하는 일이 보람차고 즐겁지만 정말로 내게 맞는지 어떤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하고 보람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나 장래의 직업에 대해 생각할 때 우선은 어떤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게 맞는 일과 행복하고 보람찬 일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자신에게 맞는지 어떤지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를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일이 예상외로 보람이 있기도 하는 법이니까.

이처럼 청소년들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을 이해하는 전부도 아닐뿐더러 그것을 발견하는 데 경험의 깊이나 삶의 근거가 충분하지도 않다. 그래서 자기이해를 위한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타인이나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일을 통해 몰입하고 재미를 느껴보며 경험을 재구성하고 확장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직업과 전공을 매칭하는 검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의 적성에 맞게 진로 탐색 과정을 기획해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지원하는 일은 현재 학교 시스템에서 역부족이다. 교육을 학교에만 가두지 않고 지역 사회로 확대하고 지역 사회와 협력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이유다.

물론 이전에도 창의적 체험 활동, 자유학기제 등을 계기로 학교와 지역 사회가 만나 왔다. 하지만 대부분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활동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강사를 구할 수 있는 곳, 학교에서 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곳 정도로 소비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지역에서 청소년의 진로와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