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가족…귤이 아니라 情을 팔아요"
[사람사는이야기] 전남대 인문대 할머니
전남대 인문대 벤치 앞서만 42년 장사한 ‘터줏대감’
5남매 먹여 살리려 시작…쫓겨날 위기 학생들이 지켜줘
"마지막 바람, 학생들·교직원 모두 행복하고 잘 되는 것"
입력 : 2017. 12. 17(일) 19:12
양손에 책을 끼고 지나가는 대학생들 틈에서 40여 년을 살았다. 수 백 명의 학생들이 이동하는 학교 내 길목에서 봄·여름에는 콘 아이스크림을 팔았고 가을이면 사과를, 겨울에는 도넛과 귤을 떼다 장사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는 경찰에 쫓기는 학생을 집에다 숨겨 줬고 경찰의 수배를 피해 백도(전남대 구 도서관·흰색 페인트칠을 한 건물이어서 백 도서관이라 부름)에 숨어든 학생들을 위해 몰래 떡을 쪄서 가져다주는 등 때론 자식 같고 손주 같은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반평생을 보냈다.

30대에 처음 장사를 시작해 이제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70대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과를 사 먹던 학생이 그 학교 교수가 돼 대학에 돌아와 퇴직할 만큼,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전남대학교 ‘인문대 할머니’라 불리는 서모씨(73·여).

인문대 3호관 벤치 앞에서 가판을 하는 그에게 학생들이 붙인 별명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인벤(인문대 벤치)할머니’, ‘아이스크림 할머니’,‘귤 할머니’,‘도넛 할머니’ 흐른 세월만큼이나 많다.

그가 이렇게 학교 한복판에서 난전(亂廛)을 펼치기 시작한 때는 1975년. 당시 전남대는 농대와 인문대 1호관을 제외하고는 복숭아 밭과 포도밭이었다.

전북 순창군 도림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 큰딸로 태어난 그는 윗동네 총각과 결혼하면서 지금의 광주 북구 용봉동, 다시 말해 전남대 경영대 뒤편으로 이사 왔다.

그러나 달콤한 신혼생활도 잠시, 남편은 결혼 10년 만에 일하던 현장에서 사고로 아내의 곁을 떠났다.

그때 서씨는 고작 서른 두살이었다. 울어대는 어린 5남매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된 것이다.

그시절, 혼자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남대 학생들에게 떡을 쪄서 판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상황이었지만 처지를 비관할 여유도 없었다. 하루라도 못 벌면 자식들은 굶어야 했기 때문에 장사가 안되는 방학이면 식당 일부터 포도 장사, 생선 장사, 폐지 줍는 일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때 상황은 어쩔 수 없었어요. 친정은 잘 살았지만 출가외인이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야말로 가장이 됐죠. 당시에는 인문대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어요. 저도 그들을 보고 떡을 쪄서 이고 지고 나왔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뭐든지 일해야 자식들 먹여 살릴 수 있었으니까요”

장사를 시작하면서 점심을 제때 먹어 본 적이 없을 만큼 고생했지만, 다행히 속 썩인 자식이 없어 버틸 수 있었다. 길에서 장사하는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을 헤아려 주기까지 했다.

준비물 살 돈이 필요한 딸이 “돈이 없어 내일 벌어서 줄게”라고 말하면 아무 말 없이 “알았다”라고 넘어가 준 게 지금도 너무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혼자서 울 때가 많았죠. 그래도 애들 속상할 까봐 눈물 바람 못하고 뒤돌아서 울었죠. 자식들이 한 명이라도 속 썩였으면 죽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같이 다 착했어요. 엄마 마음도 헤아리고 모나지 않고 잘 자라는 준 것, 그것만으로도 늘 감사하죠.”

큰 딸은 전남대 나온 착한 사위를 만나 결혼했고 나머지 네 남매도 모두 아이까지 낳고 안락한 가정을 꾸렸다. 대학교 졸업해 취업한 손주부터 막내아들의 유치원생까지 손주만 13명인 다복한 할머니가 됐다.

40년간 한 대학교에서, 그것도 ‘한 자리’를 지키기까지는 말 못 할 아픔이 많았다.

당시 학교 내에서는 장사행위가 금지된 터라 수시로 본부 직원들이 쫓아와 물건을 빼앗아 가기도 했고 호루라기를 불며 나가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떡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농대에 숨어 있다가 직원들이 사라지면 다시 나타나곤 했다. 서씨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학교 경비원들은 그의 떡을 몰래 숨겨 주기도 했다. 같이 장사하던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돈벌이가 안 된다며 하나둘씩 학교를 떠났지만 그는 ‘이곳’ 밖에는 없다는 생각에 버텼다.

한번은 인문대 학장이 서씨에게 장사를 중단하라며 공식적으로 요청하면서 일을 그만둬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때 인문대 학생회에서 다른 잡상인들은 내쫓아도 5·18 때 학생들에게 주먹밥과 떡을 나눠주며 도운 서씨 만큼은 생계권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장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80년에 지금의 백도가 지어지고 유리창도 안 끼워져 있는 상태에서 5·18이 일어났어요. 학생들이 백도 안에서 며칠째 숨어 지냈는데 배고플 것 같아 줄에 두레박을 이어서 주먹밥, 떡 등을 담아서 올려주며 먹고 힘내라고 격려했죠. 그때 그 학생들이 인문대 학생회 임원들이 됐고, 그러면서 학생들이 제 방패막이가 돼 준 거예요. 잊지 않고 생각해줘서 참 감사했죠.”

이제는 장사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살 형편이 됐지만 그는 계속 학교에 나온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힘이 돼 준 학생들이 그리워서다. 또한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한다.

먹고 살기 바쁠 때는 몰랐지만 5남매를 출가시킨 후에는 적적한 마음이 든다.

지난 2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왼쪽 다리를 수술하면서 한 달 간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왔구나”라는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어요. 부잣집 딸로 태어났지만 딸이라고 아들들만 공부시킨 부모님도 생각나고 그러면서 자식들과 힘겹게 살아온 세월 들이 떠올랐죠.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 왔네. 참 불쌍하구나’라는 서글픈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외롭지 않은 건 학교에 나와 장사할 때 아는 척하며 ‘어머니’, ‘할머니’라며 살갑게 대하는 학생들이 있어 마음이 따뜻하죠.”

그는 학생들을 ‘한 식구’라고 표현한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어머니 바람 많이 불어요. 이제 들어가세요”라고 인사말을 하고, 그가 귤 상자를 옮기려고 하면 학생들이 서로 나서서 도와준다.

최근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 학생 한 명이 날이 추워졌다며 서씨에게 목도리를 곱게 포장한 상자를 주고 갔다. 또 서씨를 자주 보며 친하게 지낸 한 남학생은 청첩장을 주며 결혼식을 초청해 축하해주러 다녀오기도 했다. 엄동설한에도 고생했던 기억들이 이렇게 학생들과 동고동락한 ‘추억’과 겹쳐 ‘인생 잘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전한다.

사시사철 종류가 달라지는 그의 간식은 학생들에게는 출출할 때 먹는 요깃거리면서 추억거리다.

처음에 그는 청미래덩굴이라 불리는 명감나무 잎사귀로 떡을 쪄서 100원에 10개씩 팔았다. 그러다가 여름에는 떡이 잘 상하고 팔리지 않자 15년 전부터는 콘 아이스크림을 팔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세 스쿱(scoop)을 콘에 올려서 주는데 한여름에는 동이 날 정도로 잘 팔렸다. 학생들은 이 아이스크림을 시중에서 인기 있는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베스킨라빈스’와 ‘인문대 벤치’라는 이름과 결합, ‘인벤스라빈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겨울에 파는 도넛도 배고픈 학생들에게는 지금도 인기다.

42년 동안 그를 보며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남대를 졸업했다면, 다들 한 번 쯤은 그가 파는 간식을 먹어 봤을 터. 안 먹어 봤더라도 지나가면서 그의 모습을 본 적은 있다.

전국, 전 세계로 활동 무대를 펼치고 있는 졸업생들은 각지에서 그를 알아본다.

약 6년 전 동네 주민들과 청와대 견학을 갔을 때 만난 공무원 한 명이 “인문대 할머니 아니시냐”면서 꾸벅 인사를 하더란다. 자신이 전남대 졸업생이라면서 할머니를 많이 봤다고 아는 척한다. 또 한 번은 자식들이 보내 준 일본 여행에서 동행한 가이드가 “인문대 학생이었다”면서 “할머니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고 공부했다”며 한참을 웃으면서 얘기했다. 헤어질 때는 “건강하시라”며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가지는 ‘학생들’이다. 삶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 싸워줬고 간식거리를 사 먹으며 말 한마디라도 건네준 이들은 그가 비바람 막을 지붕 하나 없는 길 위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40여년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학생들이고, 교직원이고 수십 년 간 이 자리에서 만나고 지나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잘 됐으면 좋겠어요. 내 인생은 전남대와 함께 했어요. 이것을 빼면 내 인생은 없죠. 앞으로도 인문대 할머니, 아이스크림 할머니로 남으면서 학생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박사라 기자 parksr@gwangnam.co.kr
사람사는이야기 최신뉴스더보기

기사 목록

광남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