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인권과 생명의 도시’ 광주, 안전 인권은 어디에…
임현준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부교수
입력 : 2026. 02. 24(화)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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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준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부교수
광주광역시는 자타가 공인하는 ‘민주·인권·생명의 도시’다. 1980년 오월의 함성이 증명하듯 광주의 정신은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시민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고 인간의 존엄을 세우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광주는 이 숭고한 가치를 브랜드화하며 인권 도시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해왔다. 그러나 화려한 구호와 브랜드 이면에 감춰진 시민들의 일상적 안전 성적표, 특히 도로 위 보행 환경을 들여다보면 그 가치가 충분히 구현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실시한 2025년 교통문화지수 평가에서 광주는 보행 행태 부문에서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이는 우리 지역민들의 준법의식과 안전 감수성이 높은 수준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민들의 높은 의식 수준을 뒷받침해야 할 ‘안전 인프라’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호남권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7%에 달한다. 시민들은 스스로 조심하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지만 도로 시스템은 여전히 보행자의 생명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장 시급하고도 구체적인 문제는 우회전 차량 운전자가 보행자 신호를 명확히 인지할 수 없는 교차로 환경이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경우, 우회전 차량이 보행 신호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도록 차량 쪽을 향한 ‘보조 신호등’이나 ‘스마트 잔여 시간 표시기’ 설치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편의 장치가 아니다. 실제 행정안전부와 도로교통공단의 분석에 따르면 교통사고가 잦은 곳에서 전방신호기 추가 설치 등 ‘시인성 개선’을 포함한 개선사업이 사망을 포함한 중대 교통사고를 크게 줄였다고 한다. 운전자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질수록 급정거와 신호 위반이 줄어들고, 보행자와의 충돌 가능성 또한 원천 차단된다는 것이 데이터로 증명된 것이다.

광주도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23년 우회전 전용신호등을 5곳에 우선 도입하였으며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횡단보도’도 23개소에 구축해 운영중이다. 그러나 보행자와 우회전 차량의 상충이 잦은 지점을 생각하면 시민들이 느끼는 개선 폭은 아직 크지 않다.

지자체의 열악한 재정 여건을 이유로 우선 순위에서 밀려온 측면도 있다. 광주시의 2025년도 예산은 전년 대비 10%나 늘어난 7조 6043억원이었으며, 금년에도 전년에 비해 766억원 증가한 7조 6809억원을 배정받았다. 그 가운데 시민 생명과 직결되는 교차로 안전 인프라가 ‘최우선 투자’로 분류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학(大學)’에는 ‘물유본말, 사유종시(物有本末 事有終始)’라 표현이 등장한다. 근본을 앞세우지 못하면 본말이 전도되기 마련이다. 지자체의 가장 근본적인 사명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AI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도시가 정작 횡단보도 앞에서 보행 신호를 몰라 쩔쩔매는 운전자의 불편과 보행자의 공포를 방치하는 것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전형이다.

로마 제국이 천 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제국 구석구석을 안전하게 연결했던 ‘도로’와 그 위의 ‘질서’에 있었다. 인권이란 거창한 정치적 구호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등굣길 횡단보도에서 안심하고 발을 내디딜 권리, 운전자가 명확한 체계 속에서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권리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안전의 권리’다.

안전 예산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투자’이다. 지역의 인구소멸을 걱정하고 외부 인구의 역내 유입에 열을 올릴 때, 지역을 지켜온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빛고을 광주가 도로 위에서도 시민의 생명을 밝히는 진정한 생명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오늘 퇴근길에서 마주하는 신호등 하나가 광주의 브랜드를 완성하는 소중한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광남일보@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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