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광주시민일보(시청시보)에 연재를 시작해 1998년까지 7년 동안 연재했던 소설가 최문경(78·광주)씨의 대하 장편소설 ‘수채화 속의 나그네’(전 9권)가 계간 문예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책명으로 새롭게 최근 출간됐다. 5·18항쟁 44주년을 기념해 발간이 추진됐지만 항쟁 주간 바로 이어 5월 30일 1권이 출간 된 이후 한달새 나머지 9권이 모두 출간돼 의미를 더한다.

1992년 무렵 소설의 골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당시도 미완의 역사로 남았던 5·18항쟁의 서사를 시민사회로 끄집어내 공론화시킬 뿐 아니라 5·18에 대해 일상에서 기억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연재됐다.

쉬쉬하며 5·18을 입밖으로 언급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5·18이 일어난지 12년을 맞은 1992년 더이상 음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소신 아래 작가는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시민일보에 연재하던 무렵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작가는 당시 5·18 항쟁의 본산 중 한 곳이었던 옛 전남도청과 충장로 인근에 있는 광산동 72번지에서 온몸으로 체험한 것을 밀도있게 소설 속으로 끌어 들였다. 그러다니 그날의 아픈 현장들로 인해 상처의 시간들이 소설 곳곳에 박혀있는 셈이다. 작가는 5·18 당시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계엄군들이 쏘아대는 총탄이 지붕 위를 날아다니며 집 지붕을 뚫었을 때 받은 충격과 공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5·18항쟁이 시간적으로 주무대이지만 공간적 배경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주암호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의 시가는 보성군 문덕면 봉정(외얏동)마을이 5·18 발발 1년 전인 1979년 주암호로 인해 수몰되면서 취재를 시작했고, 1980년 5월 18일 그는 옛 전남도청 옆 광산동에 머물렀다. 7년 동안이었는데 그해 27일 계엄군이 발사하던 총탄이 지붕을 뚫고 들어왔을 정도로 긴박했다. 이러다 죽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마당에 작두샘이 었어서였는지는 모르나 실제 계엄군이 집으로 들어와 물을 달라 하던 기억도 있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5·18항쟁 열흘동안 총탄이 쏟아지는 전남도청 앞에 나가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먹을 것을 전하고 더러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며 같이 분노하고 울기도 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김종회 문학평론가(전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는 ‘44년 세월을 견딘 저항과 통곡의 서사’라는 제목의 해설을 통해 “5·18을 다룬 작품은 부지기수로 많다. 홍희담 최윤 임철우 한강 등의 작가를 별반 어려움 없이 떠올릴 수 있다”면서 “여기에 최문경이 하나의 획을 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간 문학적 성과를 제시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문학사적 진전”이라고 평했다.

이 대하소설은 모두 9권으로 구성됐다. 제1권은 ‘장박골의 아침’, 제2권은 ‘신군부와 시민군 형제들’, 제3권은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제4권은 ‘붉은 실, 흰실이 뒤섞인 인동꽃 수의 머리띠’, 제5권은 ‘나는 보았다. 군인이 등에 꽂고 있는 대검을’, 제6권은 ‘아내의 갈퀴손’, 제7권은 ‘우리는 외곽도로 경계, 조칠 의형제’, 제8권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제9권은 ‘5·18이 없다면 6월 항쟁도 없다’ 등이다.

작가는 먼저 5·18항쟁발발과 원인에 대해 시대적 분위기를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양한 등장인물군을 통해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 5·18을 그린다.

보성군 문덕면 출신으로 문덕면사무소 공무원인 김득수, 문덕면 쇠골목마을 출신으로 특전사여단 시위 진업군이었던 권덕룡, 언론인 출신으로 5·18때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 뒤를 이어 초당골다원을 운영한 박기종, 권덕룡 일병의 모친인 예당댁, 작가 지망생으로 5·18때 가톨릭센터 뒤 문예창작교실에 있다가 계엄군에 끌려가 모진 폭력에 시달렸던 윤효정, 문덕면 출신으로 시위대 선봉에 섰던 송광민 등이 등장한다.

또 무장 시위대를 이끌었던 임규정, 투사회보를 발행해 시민사회에 배포했던 염창호, 문덕면 사무소 공무원이자 염창호의 조카였고 구속자 진상조사위원에 몸 담고 활동 했으며 약혼자 강민정과 헤어진 염평식, 김득수의 아내이자 암매장된 임규정의 누나인 득량댁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신건강이나 성 고문, 기억 상실, 암매장, 구속, 파혼 등으로 인한 혼란에 빠진 후유증 속 현실공간에서 5·18을 각기 기억하며 살아간다. 44년 전 발발했던 5·18이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소설가 최문경씨는 경북 고령 출생으로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91년 문예지 등으로 등단했으며 단편소설집 ‘파랑새는 있다’와 ‘어머니의 부표’, 장편소설 ‘장마는 끝나지 않았다’·‘물한실’·‘나홀로 가는 길’·‘귀호곡’ 등 다수를 펴냈다. 제1회 문예바다 문학상과 제5회 직지소설문학상, 손소희문학상, 제6회 박종화문학상, 제46회 한국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소설가협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현재 광주문인협회 소설분과 위원장과 한국소설가협회 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계간 ‘문예바다’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