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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치유의 음악’…끊임없이 연마해야죠"
[남도예술인]광주시립창극단 차석단원 이복순 명창
성창순·이난초 사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98년 창극단 입단 25년 활동 ‘목포 전국국악경연’ 대통령상
도휘국악연구소 운영 "퇴직 후 소외계층 재능기부 꿈" 밝혀

2023. 09.03. 11:14:36

광주시립창극단 특별공연 ‘판소리 감상회’에서 소리를 선보이고 있다.

광주 북구 운암동에 위치한 도휘국악연구소는 한 소리꾼의 지나온 인생과 꿈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다. 주인공은 광주시립창극단 차석단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인 이복순 명창이다. 그가 도휘국악연구소의 문을 연지 30여년이 흘렀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이곳에서 지내온 셈이다.

연구소 내부 벽 한 켠에는 그의 지난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추억의 사진들이 여러 장 걸려있다. 제자의 동편제 ‘흥보가’ 완창무대, 제자들과 산공부 떠났을 때, 동료들과 함께 한 공연 모습 등….

시립창극단에 입단해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무대에 오르며 소리와 함께 해왔다. 결혼하고 출산한 이후에는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집과 연구소를 오갔다. 어깨 너머로 엄마를 따라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놀던 딸은 어느새 훌쩍 자라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음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

도휘국악연구소에서 만난 이복순 명창은 호탕하고 밝은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명창은 최근 높은 호응 속에 선보인 광주시립창극단 특별공연 ‘판소리감상회’에 대한 소회를 먼저 밝혔다. ‘흥보가’ 중 ‘초압 대목’부터 ‘제비노정기’까지 약 1시간 반 동안 무대를 꾸몄는데 관객들의 집중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판소리감상회는 공연자와 관객 모두에게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요. 보통은 무대에서 판소리를 10분에서 15분 정도 보여주는데 판소리감상회는 훨씬 길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몰입도와 이해도가 높죠. 객석과 하나된 마음으로 소리를 할 수 있어 무척 즐거웠습니다.”

그가 국악을 시작한 지 어느덧 40여년이 넘었다. 예인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시절,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겠다는 그를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했다. ‘남부끄럽게 기생학교가 웬 말이냐’며 ‘당장 그만 두라’고 성화를 내던 아버지의 만류에 남몰래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더 이를 악물고 오기로 열심히 소리를 붙들었다. 소리를 하면 힘든 마음이 후련해지고 외로움도 달랠 수 있었다.

소리를 좋아하게 된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친할머니와의 기억이 자리한다. 흥이 많아 노래를 좋아하던 할머니는 손주들이 모이면 꼭 노래를 시키곤 했다. 할머니께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앞장서 민요를 불렀고, 타고난 솜씨 덕에 사랑을 독차지했다.

‘제24회 목포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모습
이복순 명창은 “평생을 어렵게 연마해온 소리를 더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무대에 더 이상 설 수 없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소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우리 집 큰딸이라 대표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부모님도 노래를 곧잘 하셨구요. 그런 환경에서 자연스레 노래를 가까이하며 자랐죠. 학교 체육대회나 노래대회가 있으면 항상 제가 나갔구요. 일본 학교와의 자매결연 행사에 선출되면서 해외 무대에 나선 적도 있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전남대에 국악과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고, 선생님은 ‘앞으로 국악 하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며 지원을 권유했다.

고민하던 찰나 자신감을 심어준 건 평소 가까이 지내던 막내 이모였다. 소리가 너무 하고 싶다는 그에게 이모는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자처하며 응원을 보내줬다. 덕분에 부모님 몰래 김향순 명창(전남무형문화재 ‘흥보가’ 보유자)에게 개인수업을 받으면서 소리에 대한 고집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전남대에 입학한 후에는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던 성창순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에게 강산제 ‘심청가’와 ‘춘향가’를 배웠으며, 이난초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에게 동편제 ‘흥보가’와 ‘수궁가’를 사사했다.

꾸밈음이 많고 섬세한 서편제와 우렁차고 남성적인 동편제 소리를 두루 배우며 목은 더욱 튼튼하고 풍성해졌다.

타고나길 튼튼한 목을 가졌다는 그는 은사인 성창순 명창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산공부를 들어간 어느 하루, 목소리가 멀쩡한 탓에 연습을 안했다는 오해를 받고 선생께 야단을 맞은 기억이다.

“연습을 죽도록 했는데도 목이 멀쩡하니 선생님이 열심히 안 한다고 오해하실 때도 있었어요. 하도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에 하루는 ‘하산하렵니다’ 하니, ‘그래 가라’하며 호통을 치셨죠. 선생님이 ‘오메, 저거 목 좀 한번 꺾어봤으면 쓰겄다’ 말하시곤 했어요.(웃음)”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면 타이밍과 운이 좋았다고 본다. 전남대 졸업을 앞둔 1986년 전남도립국악단이 창립됐고, 졸업을 1년 앞두고 시험에 바로 합격하면서 직장을 얻었다. 결혼 후 출산으로 일을 잠시 그만뒀다가 1998년 광주시립국극단(현 시립창극단)에 입단했다.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창극단과의 추억도 많다. 그중 흥보 처 역할을 맡아서 창극 ‘흥보가’를 멋지게 선보였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동료들과 함께 이룬 성과라 더욱 값지고 소중하다.

2012년에는 ‘제24회 목포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심청가’ 중 눈대목인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을 불러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 전까지 여러 대회를 나갔지만 아쉽게 1등을 놓치곤 했었다. 그날은 유독 자신감이 있었고 1등을 받을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모든 무대는 항상 설레고 떨리지만 대회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 때문에 더욱 긴장하죠.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진 못했는데, 이상하게 자신감이 있었어요. ‘실수만 안하면 이번에는 내가 가져가겠구나’ 생각했죠.”

이 명창이 도휘국악연구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바탕은 첫번째로 배운 ‘심청가’다. 배울 당시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 찡한 순간이 많았다.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팔려가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절절한 마음으로 소리를 했다.

지금껏 ‘심청가’와 ‘흥보가’ 완창발표회를 다수 선보여온 그는 기존의 바탕을 꾸준히 연마하는 한편 아직 완창하지 못한 ‘수궁가’를 완창하기 위해 소리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한바탕을 배우려면 몇 년이 걸립니다. 한번 배우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다시 수정하고 공부해야 하죠. 모든 소리는 배운 후 무대에서 완창을 해야 편해지고 익숙해져요. 아직 ‘수궁가’는 완창을 한 적이 없어 열심히 연마하고 있습니다.”

소리를 시작한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나 많아 하루도 빠짐없이 도휘국악연구소를 집처럼 드나든다. 평일, 주말할 것 없이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연습을 한다.

“원래 상청이 높은 사람은 하청이 부족한 편이거든요. 요즘 상청과 하청이 고루 잘 나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좀 더 탄탄하고 무게있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요. 집안일을 하다가 잠깐 들르고, 밥 먹고 나서 또 오고 그러면서 하루 종일 소리와 함께 하죠.”

그는 내후년이면 정년으로 시립창극단을 떠난다. 평생을 어렵게 연마해온 소리를 더 많은 제자들에게 다 가르쳐주고 떠나겠다는 각오를 다져본다. 퇴직 후에는 소외계층을 찾아가 재능기부 공연을 하며 살고 싶다는 꿈도 꾼다. 무대에 더 이상 설 수 없는 순간까지 매년 쉬지 않고 소리를 선보이고 싶다는 바람이다.

“판소리는 ‘치유의 음악’이죠. 수강생들을 가르쳐보면 힘든 일이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응어리진 게 편해진다고 말하곤 하거든요. 나이 드신 분들이 배우기에 참 좋죠. 제 이름 가운데 ‘복’자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동안 멋진 직장에서 좋은 작품을 많이 할 수 있었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김민빈 기자 alsqlsdl94@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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