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의미는 ‘수도의 길’…마음의 울림 깨우죠"
[광주작가] ‘노래하는 시인’ 신남영
현직교사로 아이들 가르치며 ‘문학과 음악’ 넘나들어
대학때 시 공부…2004년부터 문학 입문 2013년 등단
5년 내 두번째 시집 출간·여건되면 5번째 음반 발표도
입력 : 2017. 11. 08(수) 18:10
신남영 시인은 “제게 시의 의미는 ‘수도의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도 찾고, 이웃도 살피며, 도리를 언어를 통해 찾는 과정이랄까요. 내 마음의 울림을 깨우는 게 시죠”라고 밝혔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시문학을 비롯해 소리와 캘리그리피, 그리고 최근에 시작한 영화평까지 망라해 제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입니다. 제게 모든 그간 과정이 시의 길과 연결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님에도 생경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현대예술이 장르적으로 분립돼 있기 때문이다. 시이면 시이고, 노래이면 노래라는 것이다. 융복합이니 하며 장르간 구분을 전시대의 유물처럼 바라보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그 반대로 하나라도 잘 했으면 하고 바라보는 쪽에서는 탐탁지 않은 일로 받아들인다.

물론 문학이나 미술 등 그 장르 안에서 다른 분야를 섭렵하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시와 소설을 함께하는 문인도 있고, 시와 동시, 동화를 함께 하는 문인들도 찾고자 하면 얼마든지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근래에는 이종의 이웃장르를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어 주목된다. 같은 장르 안에서 오가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으나 이종의 장르를 넘나드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문학과 음악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많을 수 있으나 프로의 반열에 오른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중 현직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학과 음악을 넘나드는 한 시인이 있다. 광주숭덕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중인 신남영씨가 그 주인공으로, 그는 광주문단에 ‘노래하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어디서 음악이 나올까 의아할 정도다. 그의 인상이 너무도 진지해 영락없는 교육자풍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다. 도저히 가락이 나올 여지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4집 앨범을 발매한 어엿한 노래꾼이다.

그에게 문학과 음악의 끼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궁금했다. 대학 재학시절 고 정재완 교수(전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로부터 시 지도를 받았다. 1988년 전남 영암여고에 처음으로 부임, 10여년을 그곳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1998년 광주로 올라왔다. 영암에 재직할 때 그는 시와는 거리가 먼 채 교육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1998년 광주에 올라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광주여대 교육대학원에 재학했는데 이때 오랫동안 내재 돼 있던 시창작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오랜 침묵의 시심을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러다 2004년 광주전남작가회의 문예교실을 거쳐 2005년 ‘꿈과 현실’이라는 명패로 운영 중이던 일곡시회에 들어가 활동을 펼치며 시공부에 매진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창작활동을 펼쳤으나 문단 등단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2004년을 습작의 출발지로 따지더라도 그는 9년 넘게 시 습작에 매달린 셈이다.

그후 2013년 ‘문학들’ 신인상으로 등단하면서 정식 시인으로서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15년에는 첫시집 ‘물위의 현’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정식 등단 이후 시단 안과 밖에 대해 그는 ‘경계’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경계같은 것이죠. 그전에는 제 자신만의 소외감이 있었습니다. 울타리안으로 들어왔을 때 새롭게 출발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새롭게 출발한 그가 첫 시집을 냈고, 앞으로 5년 이내 두번째 시집을 낼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시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날을 새가면서 창작을 하기는 어렵다. 다음날 수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틈틈이 시창작을 병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첫시집도 그런 과정 속에서 펴냈다.

요즘 들어 부쩍 그에게 시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제게 시의 의미는 ‘수도의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도 찾고, 이웃도 살피며, 도리를 언어를 통해 찾는 과정이랄까요. 내 마음의 울림을 깨우는 게 시죠. 연주자가 최상의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빗댈 수 있어요. 그래서 제 첫 시집이 ‘물위의 현’이 된 것이구요.”

그는 꼭 써보고 싶은 시로 자기존재의 탐색과 공동체 삶에의 관심 혹은 사회적 자아성찰이 노정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늘 진중하게 노력하는 자세로 일상을 끌고 가며, 예술활동을 챙긴다. 시를 본격화한 지 3년후인 2007년 시노래에 들어선다. 1979년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국내에서는 포크가 대유행을 하게 되고, 정태춘이나 송창식 노래를 들으며 어느 순간 시를 노래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대학 때부터 작곡에 빠져들게 된다. 그에게 창작은 시가 먼저였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 그림을 그렸다. 소년한국일보에서 금메달도 받으며 많은 미술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그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집의 반대가 있어 접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진로도 국문학과에 목표를 두고 공부했고, 자신의 꿈을 성취해 냈다.

음악과의 본격적 인연은 1992년 무렵이다. 소리모아 박문옥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을 했고, 2007년 디지털레코드에 음원을 보냈는데 언더그라운드음악 쪽이라 해보라고 권유해 도전하게 된다. 주로 작고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시노래’ 중심이었다.

나중에 장석남 손택수 조용미 시인 등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그는 지역 작가들의 작품에 곡을 계속 붙일 생각이다. 현재 녹음시간이 없어 다섯번째 음반을 내지 못하고 있으나 여력이 되는대로 발표할 계획을 잡고 있다. 그는 2005년부터 무대에 올랐다.

“문예회관 무대에도 섰지요. 시인초청무대 등 작은 무대로 소수자일지라도 자연스럽고 의미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이처럼 시와 노래를 넘나들자 시나 쓰지 왜 음악을 하느냐라는 소리도 듣는다 한다. 노래가 시가 되기도 한다. 변주된다는 이야기다. 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시나 노래 모두 결국 하나로 만납니다. 여러 갈래지만 언젠가는 완숙에 도달하는 접점으로, 욕심으로 보기도 하지요. 그러나 요즘 ‘다능인’의 관점으로 좋게 봐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여기다 그는 글씨까지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을 ‘시서화가’(詩書畵歌)라고 말한다. 2014년 서화에 입문했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공모전인 대한민국예술대전 캘리그래피 부문에서 특선을 했을 정도로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개인전도 벌써 2회를 열었고, 관련 도서 2권(전자책)도 출간했다. 앞으로 논어를 캘리그래피로 써볼 작정이다.

그는 페이스북에 많은 캘리그래피 작품을 올려놓고 공유하기를 선호한다. 그는 이를 자랑이 아니라 나눔의 차원으로 봐달라 했다.

“자기작품을 올리고 판매도 하는 플랫폼이 있는데 거기다 갤러리를 만들어놓았어요. 이런 저에게 반전이 있다고 하더군요. 애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취미가 프로가 된 경우죠.”

이런 그의 꿈은 무엇일까 그의 답이 돌아왔다. 소박했다.

“소박한 무대 공간을 마련해보고 싶어요. 시와 노래, 그림을 하며 격없이 공동체식으로 살고 싶습니다. 큰 무대에 서서 조명을 많이 받고 하는 게 아니에요. 시문학을 비롯해 소리와 캘리그래피, 그리고 최근에 시작한 영화평까지 망라해 제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입니다. 제게 모든 그간 과정이 시의 길과 연결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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