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내 한인들 삶 천착…여성들의 시간과 대면
박경란 작가 필력과 세계관 응축된 첫 장편 ‘안녕, 홍이’
파독 간호사 파견 60주년 맞아…가족·시대의 기억 상기
입력 : 2026. 03. 18(수)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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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로 살아간 수많은 이름들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몸과 기억의 전승을 그리는 동시에 한국과 독일, 근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기억의 계보를 액자소설 구조로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서사문학이 나왔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독일 내 한인들의 삶을 출판과 공연으로 꾸준히 기록해온 박경란 작가의 필력과 세계관이 응축된 첫 장편소설 ‘안녕, 홍이’(하늘퍼블리싱 刊)가 그것으로, 파독 간호사 파견 60주년을 맞은 올해 다시 기억해야 할 지금의 이야기이자 가족과 인연을 넘어 기억을 이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및 불안한 시대에 생명력을 위해 읽어야 할 이야기로 한 여성의 삶에서 시작해 한 세대의 기억으로 확장되는 스토리를 선보인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독일에서 생을 마감한 파독 간호사 이모의 장례식이다. 화자는 그 죽음을 계기로, 그동안 가까이 있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특히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가족 안에서, 여성의 몸 안에서 말해지지 못한 채 흘러간 시간들을 따라간다. 엄마의 삶, 이모의 선택, 딸의 시선이 교차하며,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가족의 기억이 되고, 다시 시대의 기억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과장되지 않으며,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상황과 시간을 차분히 쌓아 올리고 있는 이 장편은 전쟁과 분단, 이주와 노동의 역사 이면에 있었던 여성들의 노동과 돌봄, 생존의 시간을 피해자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낸 존재의 언어로 기록한다.

작가는 비극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장례식의 풍경, 오래된 일기장, 흩어진 대화의 조각들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의미에 닿게 한다. 말해지지 않은 시간, 기록되지 않은 감정들이 문장 사이에 남아 있다. 이 작품은 가족서사이자 기억에 대한 소설이며, 여성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문학적 시도다.

그동안 파독 간호사는 경제 발전을 떠받친 노동력, 헌신의 상징으로 호명돼 왔다. 그러나 그 서사 속에서 개별 여성의 삶은 충분히 말해지지 못했다. 이 장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오랫동안 말해지지 않은 ‘침묵의 역사’로 남아 있던 개인의 삶을, 한 여성의 몸과 기억을 따라가며 다시 불러낸다. 역사가 아닌 삶으로서의 시간, 기록되지 못한 이름들의 시간을 이 소설은 현재로 소환한다.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영웅적 헌신’이 아니라, 이주 여성 노동자가 감당해야 했던 일상의 무게와 고독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가족과의 단절, 돌봄 노동의 이중 부담, 그리고 노년과 죽음의 문제까지로, 파독 간호사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삶의 결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이는 단지 과거를 회고하는 작업이 아니라 오늘날 이주 노동, 여성 노동, 돌봄 노동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사회적 의제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 소설에서 ‘안녕’은 작별의 말이 아니다. 오래 불리지 못했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인사다. 침묵 속 에 남겨졌던 삶을 현재로 불러오는 언어이자 한국과 독일, 과거와 현대를 건너온 시간에의 작별이자 희망의 인사다.

출판사 관계자는 “이 소설은 묻는다. 우리는 어떤 기억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삶들을 잊은 채 살아왔는가. 개인의 삶이 쉽게 소모되는 시대에, 『안녕, 홍이』는 기억을 다시 묻고 삶의 존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딸에게, 딸에게 끝내 다 말하지 못한 시간을 품고 살아온 엄마에게, 그리고 한국 현대사를 사건이 아닌 삶의 이야기로 읽고 싶은 독자에게 ‘안녕, 홍이’는 오래 남는 소설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봉옥 시인은 추천의 말을 통해 “침묵은 세대를 건너 계보가 되고, 상처는 지워지지 않은 채 오늘의 삶으로 이어진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작별이 아니라 오래 침묵해 온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박 작가는 2007년 독일로 이주한 이후, 독일 내 이민자의 삶과 기억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가운데 에세이와 인터뷰 기록집을 비롯해 파독 간호사를 다룬 특집 공연 희곡, 인종 차별과 근현대 여성사를 주제로 한 희곡 등을 집필하며 문화예술 현장에서 활동해 왔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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