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자가 쓴 소설 '역관 일지' 속의 동학정신
[북리뷰] 서용좌(소설가·전남대 명예교수)
일상 진지한 성찰·정신 총량 사초처럼 제시
난생 처음 어설픈 리뷰 쓰도록 유혹한 소설
일상 진지한 성찰·정신 총량 사초처럼 제시
난생 처음 어설픈 리뷰 쓰도록 유혹한 소설
입력 : 2025. 12. 30(화)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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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좌 소설가(전남대 명예교수)

안삼환 장편소설 ‘역관 일지’ 표지
한손에 파우스트를, 다른 한손에 동학혁명군의 두개골을 들고 일지를 쓰는 ‘나’는 우선 학자로서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파우스트 박사에 빗대어 표현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덕/간계로 “인간이어도 되는”( ‘파우스트’ 940행) 파우스트가 등장한다. 마지막은 동학혁명 때 진도 송현리에서 “채집”(15)되어서 일본에서 한 세기를 썩다가 2019년에야 전주동학혁명녹두관에 안치된 두개골이다. 이 모두를 소설이라는 “고치”(226)로 엮고자 하는 작가는 멘사 회원일 것이다. 한국의 오늘, 서양정신의 가르침, 동학정신의 가르침이라는 삼색실로 짜이는 소설은 삼각형의 내심을 향한다. 삼각형 각도의 조화가 한 곳으로 향하는 그곳 내심 말이다.
첫째 가닥은 2024년 9월에서 2025년 4월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한국의 ‘듣보잡’ 일상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한국의 현실은 추악 그 자체다. “비겁, 비열, 비루한 놈”(80)의 미친 짓거리에 통탄하며, 페이스북, 교수신문 기고 등 강력하게 의견을 토로한다. - 실제 작가의 이 글들은 이 ‘소설’에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실려있다. - 심지어 쉽게 넘어지는 다리로 키세스들을 응원하러 현장을 찾는다. 동학, 3·1혁명, 4·19혁명, 5·18정신 등 ‘과거가 현재를 도울까?’(한강) ‘나’는 그렇다고 확신하며 빛의 혁명에서 “다시 개벽의 조짐”(86)을, 언젠가는 “법 없이도 상식과 도덕만으로 아무 불편 없이 숨 쉴 수 있는 나라”(195)를 희망한다.
‘나’는 양심적인 학자가 분명한 것이, 후학들의 현실과 미래를 애통해하며, 뒤늦게 몸담기 시작한 한국문학의 현실에도 일가견을 내놓는다. 한강의 작품들과 노벨문학상에 대한 단상을 넘는 평가, ‘유령의 시간’, ‘옥정’ 등 문제적 작품들의 소개에도 진지해서, 그 책들을 읽고 싶게 한다.
둘째 가닥은 ‘나’의 진정한 본업, ‘파우스트’ 완역에 관한 이야기다. 독문학자의 자긍심을 드높이 끌어올릴 셈으로 보인다. 서양 기독교문화에서 세기를 관통하는 거장 괴테의 세계관을 소개하는 학문적 과업은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괴테의 파우스트 읽기’(안삼환)를 강의하는 영역까지 넓혀진다. 강의는 실존철학의 피투적(被投的)존재 -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 개념으로 향하다가 순간에 동학정신으로 넘어간다.
마지막, 원래의 의도로 보이는 가닥에서 ‘나’는 인류가 과거에 꽃피웠던 정신의 총량을 사초처럼 제시할/가르칠 어떤 의무감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삶”(193)을 꿈꾼다. 그것을 믿기에 해골이 현현했을 것이다. “완산 녹두님(잠정적으로 김일술)”이라고 불리는 해골 영령의 입으로, 반상, 적서, 남녀, 빈부의 차별을 없애라는 수운水雲의 평등사상, 해월(海月)의 사인여천(事人如天) 등의 가르침이 교과서에서처럼 읊어진다. 동학에 관해서도 독자는 픽션이 아니라 학문의 즐거움을 덩달아 만끽하게 된다.
소설은 설(說)이다. 보통 허구(fiction), 상상력, 창작 등의 단어로서 소설을 정의하곤 한다. 설을 두고 틀에 박힌 정의나 형식이 필요할까, 그것을 이 소설에서 느낀다. 심지어 문체도 부수적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 쓰느냐 보다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한가? 다시금 평형추가 흔들린다. 어떻든 난생 처음 어설픈 리뷰라도 쓰고 싶도록 유혹한 소설이다.
광남일보@gwangnam.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