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빠삐용Zip, 장흥에서 삶과 영화가 만나는 공간
정주미 장흥 빠삐용Zip 영화 파트장
입력 : 2025. 11. 13(목)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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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미 장흥 빠삐용Zip 영화 파트장
나고 자란 광주를 떠나 장흥에 온 지도 어느새 2년이 되어간다.

광주에서 차로 1시간 20분 남짓이면 닿을 거리지만, 막상 살아보기 전까지 장흥은 내게 그저 지도 속의 도시였다. 이곳에서 직장을 얻고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역에서 산다는 건 단순히 주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품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빠삐용Zip(옛 장흥교도소)’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장흥에 교도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2월의 바람이 차갑게 스며들던 그날, 텅 빈 교도소 건물 앞에 서 있으니 알 수 없는 서늘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곳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그렇게 시작된 낯선 두려움은 이제 나의 일상이 되었다.

교도소라는 공간은 흔히 억압과 단절, 고립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금의 빠삐용Zip은 그 이미지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삶과 이야기, 예술이 만나는 공간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며 새로운 숨결이 불어넣어지는 곳이 되었다.

1975년에 문을 열고 2014년까지 운영되던 장흥교도소는 문화재생사업을 통해 새 삶을 얻었다. ‘빠삐용Zip’이라는 이름은 1974년 영화‘빠삐용(Papillon)’에서 따온 것으로 불어로 ‘나비’를 뜻하는 빠삐용과 파일 압축을 연상시키는 ‘zip’,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집’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억압의 상징이던 공간이 이제는 회복과 공존, 사색과 치유, 그리고 창작의 집으로 변신한 것이다.

새 교도소로 이전한 2015년 이후 이곳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았다.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작품이 이곳에서 촬영되며 전라남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로케이션 장소가 되었다. 극장에서 펑펑 울며 봤던 영화 ‘1987’, 임지연 배우의 연기 변신이 인상 깊었던 ‘더 글로리’, 그리고 너무나 재미있게 봤던 ‘슬기로운 감빵생활’, 우리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모범택시2’까지, 좋아하던 영화 드라마 장면 속 배경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한동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장흥은 예로부터 ‘문림의향(文林義鄕)’으로 불린다. 문학과 예술의 기운이 깊게 배어 있는 땅이다. 이청준 작가와 한승원 작가가 모두 이곳 출신이고, 임권택 감독 또한 장흥을 무척 사랑했다. 영화‘서편제’의 원작자 이청준,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작가 한승원, 그리고 영화 ‘축제’, ‘천년학’을 장흥에서 촬영한 임권택 감독. 이들의 이름만으로도 장흥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영화 세트장이자 문학의 무대가 된다. 이청준과 한승원, 송기숙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영화로 다시 태어나며 장흥의 풍경은 스크린 위에서 또 한 번 살아났다.

작은 시골 도시이지만, 장흥은 분명 ‘영화로운 도시’라 부를 만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 또한 어느새 그 이야기의 한 장면이 되어가고 있다.

영화 일이 좋아 광주의 영화판에 뛰어들었던 나에게 장흥에서 영화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는 큰 숙제였다. 도시의 영화 현장에서만 살아왔던 내가 이곳에서는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도구 삼아 지역민과 새로운 일을 만들어간다는 것, 그건 낯설고도 막막한 과제였다.

시골에서 밭 일을 하다 영화 찍으러 가고, 모두가 감독이자 배우가 되며 카메라가 삶의 한가운데 놓이는 그런 ‘영화로운 일상’이 과연 가능할까? 그 물음 속에서 나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획하게 된 것이 마을 주민을 변사로 양성, 마을 변사가 되어 마을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하는 마을 순회 무성영화변사극 ‘빠삐용 유랑단’과 장흥의 마을 이장들과 함께 새로운 촬영지를 발굴하는 ‘빠삐용 로켓단’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장소를 영화의 언어로 다시 읽어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영화는 카메라 앞에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라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시골 어르신들의 문화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젊은 세대 못지않다는 것도.

이 외에도 빠삐용Zip의 또 다른 영화로운 공간인 ‘영화로운 책방’과 ‘영화당’은 영화와 지식, 배움과 향유가 흐르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장흥 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며 새로운 문화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빠삐용Zip은 지난 7월 25일 개관 이후 또 한 번의 나비의 비상을 준비 중이다.

최근 리모델링된 서로살림터에는 화덕터와 공유 주방이 마련되어 지역민과 관람객이 직접 피자와 가마솥 요리를 만들고 나누며 장흥의 생태와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주민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진 ‘또나 인형 만들기’, ‘뜨개 명상’, ‘내가 만든 요리당’, ‘보드게임’, ‘꽃차 만들기’, ‘인디언 집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은 공간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며 지역민과 관광객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장을 열고 있다.

앞으로 서로살림터는 체험 프로그램뿐 아니라 우산 수리, 자전거 수리 등 생활 기술자들의 참여로 흥미로운 이벤트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를 통해 주말 체류 인구를 늘리고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목표다.

삶과 영화, 사람과 공동체가 맞닿는 장흥의 빠삐용Zip.

이곳에서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

나비처럼 날아오른 이 특별한 공간에서

우리는 삶과 영화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광남일보@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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