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바벨탑을 무너뜨린 여호와와 AI
강나루(계간 ‘시와사람’ 편집장)
입력 : 2025. 05. 08(목) 18:10

강나루 계간 ‘시와사람’ 편집장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약 6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문명의 전환점 앞에 섰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이 이 대전환의 중심에 있는데, AI는 과거 고도로 연마한 전문가만이 수행할 수 있었던 복잡한 작업을 대중의 추상적인 명령만으로도 제공함으로써 전문 지식과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다. 이는 마치 훈민정음 반포로 인해 문맹이었던 대다수 백성이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된 역사적 변화와 닮았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문자 발명을 넘어, 지식과 표현의 대중화를 이끈 혁명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어는 유례없는 문자 접근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자국어로 대학 교육은 물론 고도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익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흔히 정치권에서는 대한민국을 ‘인적자원’이 유일한 자원 빈국이라며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토대가 없었다면 ‘인적자원’마저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AI의 발전을 지켜보는 여러 집단에서는 대격변을 예측하고 있다. 코딩, 데이터 분석, 번역, 창작 등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영역이 AI의 보조를 받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영역으로 강하되고 있다. 이는 AI의 발전이 현대의 수많은 기술적 진보 중의 하나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표현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마치 쉬운 문자의 보급이 수많은 목소리를 기록하게 했듯, AI 또한 다양한 표현과 사고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밋빛 미래에 앞서, 우리는 한 가지 중대한 차이를 직시해야 한다. 훈민정음은 전제군주였던 세종이 백성을 위해 제한 없이 완전하게 개방한 문자 체계였다. 반면, 현재의 AI는 거대 기업들이 각기 이익을 위해 개발하고, 사용 조건을 설정하며, 핵심 기술을 비공개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완전한 공공재로서 기능한 한글과 달리, AI는 오픈소스 진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사유화된 기술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다양성과 대중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근본적인 위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구조이자,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우리는 같은 한국어 안에서도 지역 방언, 구전설화 등 수많은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다름이야말로 문화적 풍요를 위한 다양한 선택지임을 알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의 역사 또한 유사한 변화를 겪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계어에 가까운 어셈블리어에서 시작해, 점차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C언어, 파이썬 등으로 변화해 온 흐름은, 인간의 몸짓 언어가 점차 음성과 문장 구조를 갖춘 언어로 진화하고, 또 환경에 맞춰 다양한 구조의 언어로 분화한 과정과 닮아 있다. 문법과 뉘앙스가 다른 인간의 수많은 언어는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비효율의 극치일 수 있다. 만약 여호와가 효율만을 원하는 신이었다면, 바벨탑을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단 하나의 언어만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탑은 무너졌고, 인류는 다양성 속에서 문화적 풍요를 발견해 왔다.
AI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방식으로만 사고하고, 하나의 표현만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인간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AI의 발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표현과 사고의 대중성을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지, 인간을 대체하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AI가 훈민정음처럼 모두를 위한 도구가 되려면, 기술의 공공성과 접근 가능성, 개방성과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효율만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다름과 느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불완전함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지금 이 순간, AI라는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마주한 우리는 묻는다. 이것이 또 하나의 훈민정음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하나의 무너지지 않은 바벨탑으로 남게 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문자 발명을 넘어, 지식과 표현의 대중화를 이끈 혁명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어는 유례없는 문자 접근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자국어로 대학 교육은 물론 고도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익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흔히 정치권에서는 대한민국을 ‘인적자원’이 유일한 자원 빈국이라며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토대가 없었다면 ‘인적자원’마저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AI의 발전을 지켜보는 여러 집단에서는 대격변을 예측하고 있다. 코딩, 데이터 분석, 번역, 창작 등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영역이 AI의 보조를 받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영역으로 강하되고 있다. 이는 AI의 발전이 현대의 수많은 기술적 진보 중의 하나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표현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마치 쉬운 문자의 보급이 수많은 목소리를 기록하게 했듯, AI 또한 다양한 표현과 사고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밋빛 미래에 앞서, 우리는 한 가지 중대한 차이를 직시해야 한다. 훈민정음은 전제군주였던 세종이 백성을 위해 제한 없이 완전하게 개방한 문자 체계였다. 반면, 현재의 AI는 거대 기업들이 각기 이익을 위해 개발하고, 사용 조건을 설정하며, 핵심 기술을 비공개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완전한 공공재로서 기능한 한글과 달리, AI는 오픈소스 진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사유화된 기술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다양성과 대중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근본적인 위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구조이자,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우리는 같은 한국어 안에서도 지역 방언, 구전설화 등 수많은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다름이야말로 문화적 풍요를 위한 다양한 선택지임을 알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의 역사 또한 유사한 변화를 겪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계어에 가까운 어셈블리어에서 시작해, 점차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C언어, 파이썬 등으로 변화해 온 흐름은, 인간의 몸짓 언어가 점차 음성과 문장 구조를 갖춘 언어로 진화하고, 또 환경에 맞춰 다양한 구조의 언어로 분화한 과정과 닮아 있다. 문법과 뉘앙스가 다른 인간의 수많은 언어는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비효율의 극치일 수 있다. 만약 여호와가 효율만을 원하는 신이었다면, 바벨탑을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단 하나의 언어만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탑은 무너졌고, 인류는 다양성 속에서 문화적 풍요를 발견해 왔다.
AI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방식으로만 사고하고, 하나의 표현만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인간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AI의 발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표현과 사고의 대중성을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지, 인간을 대체하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AI가 훈민정음처럼 모두를 위한 도구가 되려면, 기술의 공공성과 접근 가능성, 개방성과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효율만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다름과 느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불완전함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지금 이 순간, AI라는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마주한 우리는 묻는다. 이것이 또 하나의 훈민정음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하나의 무너지지 않은 바벨탑으로 남게 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광남일보@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