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4월이면, 진달래와 철쭉의 시절이다. 산천에 진달래 피고, ‘곡우’ 내린다. 곡식에 내리는 비. 곡우(穀雨)이다. 그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 것이다.

춘우(春雨)와 같이 봄비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곡우라고 했을까?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의 얘기이다. 곡식이 귀했다. 사람만큼 귀했다. 곡식은 사람을 살려내고,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이때는 추워서 얼어 죽을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부지런하지 않으면 자칫 보리 수확 때까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땅은 온통 푸릇푸릇하다. 여기저기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생명력을 이어야 했다.

곡우 때 생명력 가득한 땅은 촉촉해야 한다. 만약 이때 비가 오지 않고 가물어 땅이 메마르면, 한 해 농사는 망친다. 그래서 양력 4월 20일에 내리는 이 비를 곡우라고 했다. 사람들의 소망이 이렇게 간절하다.

찹쌀을 갈아 진달래로 화전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은 우리 세대 이후에 사라질 것 같다. 성미 급한 진달래는 잎사귀 돋기 전에 꽃부터 드러낸다. 산 꽃 따먹던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함께, 3~4월 이맘때쯤 뒷산은 진달래로 물들었다.

들녘을 바라보는 농부의 손발은 바쁘다. 보리농사 수확은 아직 멀었지만 벌써 벼농사 채비도 해야 한다. 곡우 때쯤에 서해에서 잡히는 조기는 알이 많고, 그 살이 연하면서 맛이 최고로 알려졌다.

그래서 곡우 때 조기잡이도 유명하다. 이때 잡히는 조기를 ‘곡우사리’ 조기라고 했다. 특별한 조기이다. 당연히 가격도 최고로 쳐줬다. 이 무렵 북한 함경도 용흥강은 숭어떼가 몰려온다. 산란기가 돼 올라온 숭어 같은 물고기에 어부들은 횡재한다.

우전차(雨前茶)는 차 잎 따는 곡우 시즌에 맞춰 붙여진 차 이름이다. 이때의 비(雨)는 봄비로 곡우를 말한다. 그래서 곡우와 우전차는 DNA가 같다. 곡우 직전에 차 잎을 따서 만든 차가 우천차이기 때문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옛사람이 말한 우전차란 대개 3월 중의 곡우 이전에 딴 것이다’고 했다. 음력 3월이면 양력 4월이다. 우전차는 딱 한 철에만 생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귀하디귀해 선물용으로 많이 사용한다. 차의 모양도 ‘매 손톱 모양’이라고 했으니 옛사람들의 표현에 무릎을 친다.

나무 새싹은 수분이 필요하다. 때를 만난 나무도 부지런하다. 열심히 나무줄기를 통해 잎사귀에 물을 보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중간중간에 홈을 파서 줄기에 흐르는 그 물을 빼 먹는다. 곡우물이다.

2~3월 고로쇠물과는 좀 다르다. 대개 자작나무나 박달나무 수액이다. 그 수액은 각종 미네날이 풍부하고 항염 효과로 알려져 있다. 자작나무 껍질은 차로도 우려서 마신다.

요즘은 크림이나 선크림 혹은 수분패드 재료로도 쓰인다. 박달나무는 향균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나무를 통해 곡우물을 훔쳐먹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시절은 농사일이나 바닷일이나 때맞춰 모두 먹고사는 일에 바쁘다.

곡우는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로 봄의 마지막 절기이다. 곡우 지나면 여름을 알리는 입하(立夏)가 된다. 곧 여름이다. 태양이 지나가는 자리인 황경(黃經)이 춘분부터 시작하므로 곡우는 황경 30도가 되는 때이다.

24절기 중, 춘분과 하지, 추분과 동지 등 4절기만이 천문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1년 24절기를 4등분했다. 그리고 나머지 절기 이름으로 대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과 희망을 은유적으로 담고자 했다. 곡우가 대표적이다. 봄비 중에 귀하디귀한 봄비를 곡우라고 했다. 소망을 담아냈다.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에 들어온 꽃 중에, 캅카스와 아프가니스탄이 원산지인 라일락은 곡우 전후로 꽃이 핀다. 시골 친구집 마당의 라일락은 그 향기를 맘껏 풍긴다. 라일락의 꽃말이 아름답다. ‘첫사랑’과 ‘젊은 날의 추억’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