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비아 공화국
김인수 사회교육부장
입력 : 2023. 09. 03(일) 17:33
[데스크칼럼] 전국이 포비아(phobia·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시국 3년, ‘마스크 포비아’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포비아를 마주하고 있다. 묻지마 살인, 교권 추락, 전세 사기, 이상기후 등 미처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대한 공포심이 일상으로 소환되면서 어느 한 순간에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

그 정점은 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이다.

지난 7월 21일 서울 신림역 살인 사건에 이어 전국 곳곳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이 벌어져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각종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익명의 살인 예고 글이 경쟁하듯 올라오고 있다. 해외토픽에서나 볼법한 사건들에 대한 공포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시민들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호신용품을 구비하고, 보행 중에는 잠시 이어폰을 빼놓기도 한다.

교권 추락의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 달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서울 서이초교 교사의 자살이 우리 사회에 ‘교권 회복’이라는 무거운 화두를 던졌다. 교원단체는 학교 현장이 서비스 제공 공간 정도로 치부되다 보니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나 아동학대 혐의 고소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학교에선 제대로 된 교육이나 훈육이 불가능해졌고 더 큰 문제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고 호소한다. 교내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생활지도 전담교사, 교내 경찰, 변호사 선임 등 관련 제도와 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시기에 발표된 교육부의 개정된 ‘학폭 사안 처리 가이드북’ 후속 조치가 이달부터 시행된다. 이번 조치가 학생 인권과 교권 회복의 균형추를 맞출 수 있을지 주목된다.

건설 현장의 불안도 도를 넘었다.

광주 학동과 화정동 붕괴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최근 LH 아파트의 철근 누락 사태가 터지면서 전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다. 이른바 ‘순살 아파트’ 관련 뉴스를 보며 내가 사는 아파트는 괜찮은지 불안하다. 시민은 매번 왕래하는 주차장이 무량판 구조인지, 철근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어 불안감만 커간다. 무량판 구조로 지어진 ‘순살 아파트’ 사건은 건설업계의 그릇된 관행이 불러온 현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부는 강력한 처벌을 예고하는 등 건설업계의 부조리를 뿌리 뽑겠다고 서슬이 퍼렇지만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다. 불신의 누적된 결과다.

‘전세 포비아’도 심화하고 있다. ‘사기’라는 단어와 함께 입길에 오르는 전세 얘기다.

얼마 전 ‘빌라왕’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면서 피해 세입자들은 전세보증금을 고스란히 떼일 처지에 몰렸다. 알고 보니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 집주인은 돈이 없어 보증금을 못 주는 상황이다. 공인중개사도 한 패라서 받아놓은 각서도 소용 없다. 사기꾼 일당은 잡혔지만 긴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돈을 돌려받을 길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집은 곧 경매에 넘어간다. 낙찰되면 전세보증금 한 푼 못 받고 거리에 나앉을 판이다. 대출까지 받아 마련한 전세보증금을 떼일 판이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오피스텔이나 빌라 세입자들은 이번 일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날이 좌불안석이다.

역대급 장마와 폭염을 겪고 가을철 태풍 걱정까지, 이상기후도 혼란스럽다.

‘최고기온 38도, 체감온도 40도, 초열대야 30도’의 현상도 이제 낯설지 않다. 앞으로도 예상을 뛰어넘을 폭염, 폭설, 폭우 등 기후재난의 파괴력에 촉각이 곤두선다. 극한의 기후를 만들어 내는 요인은 지구온난화로 지목되고 있는데, 단기간에 온난화를 감소시킬 효과적인 대책이 없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다고 늘 포비아에 사로잡혀 살 수는 없다. 공포와 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를 되돌아볼 때다.

누구든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경매로 넘어갈지 모르는 부실한 집에서 살고 싶은 이가 있겠는가. 누구든 집에 돌아오지 않은 가족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겠는가. 누구든 내 자식이, 내 아내가 학교와 직장에서 가슴을 치며 불행해 하는 일을 겪게 놔두고 싶겠는가.

다양한 상황에서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누구든 갑이 될 수 있고 을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듣기 싫었던 말, 내가 겪기 싫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 지 되돌아보자. 속도에만 치중하고 실적에 올인했던 나라에서 모두가 안전한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사람은 바로 우리 임을 잊지 말자.
김인수 기자 joinus@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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