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균수 칼럼/ 화순탄광
주필
입력 : 2022. 11. 27(일) 15:48

호남지역 최대탄광인 화순탄광의 폐광이 내년 말로 다가오면서 폐광 후 활용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이 높다.
화순탄광은 1934년 첫 채굴을 시작한 뒤 채광 노동자의 피와 땀이 뒤범벅된 굴곡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화순광업소는 종연탄광과 남선탄광이 모태이다. 종연탄광은 1905년 박현경이 발견해 광업권을 취득한 뒤 1908년 일본인 야마쿠치가 광업권을 사들여 채광이 이뤄진다.
남선탄광은 1915년 일본인 다이마루가 광구등록을 한 뒤 1935년 일본인 기무라가 남선탄광주식회사를 창립해 구암삼거리 위쪽 갱도개발을 시작했다.
종연탄광과 남선탄광은 일본이 패망하자 탄광노동자들은 바로 자치위원회를 구성, 탄광을 운영했다. 당시 자치위원회는 노동자와 지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생산성도 일제 강점기보다 오히려 높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미군정은 두 탄광을 강제로 점령해 화순탄광으로 통합운영했다. 이에 반발하는 노동자는 해고시켰다.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광복 1주년인 1846년 8월15일 광주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미군은 화순 너릿재를 넘는 노동자들을 탱크와 비행기까지 동원해 강제로 진압했다. 탄광노동자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행진을 이어가자 미군은 비행기 총격으로 수십 명을 죽게 만들고 수백 명을 다치게 만들었다.
이 화순탄광노동자 학살사건은 미군정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이 압살 당하는 이데올로기의 비극이다.
1950년 11월 1일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면서 화순탄광은 석탄공사 산하 화순광업소로 운영되고 있다.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 실시된 이후 대다수의 광업소가 폐광됐고, 지금은 화순광업소와 함께 전국에서 단 4개의 광업소만 운영되고 있다.
화순탄광은 930만평의 면적에 17개의 광구를 두고 있다. 총 매장량은 4,200만 톤으로 전국 매장량의 2,9%, 대한석탄공사 총 매장량의 15.3%에 해당한다.
화순탄광의 일제강점기 최대 생산량 기록은 1944년에 25만톤이었으나 해방 후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1963년에 64만 톤, 1989년 70만 5천 톤 생산 기록을 세웠다. 이후 정부의 감산정책으로 생산량이 급감해 2000년에 들어 35만 톤 생산에 그치더니 지난해엔 7만5200t으로 완전히 줄어들었다. 1500명이 넘던 노동자 수도 지금은 272명에 불과하다.
화순탄광은 산업의 현대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왔으나 에너지 수요가 변화해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더 이상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내년 말 폐광되는 운명을 맞았다.
폐광 방침에 따라 화순 탄광의 근로자 고용승계와 대체산업 개발 기반조성, 주변 마을 지원대책 등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화순탄광이 폐광되면 당장 광업소와 협력업체 근로자 300여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그 가족 등 900여 명이 타지역으로 유출될 것으로 전망되는 등 지역경제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화순군은 이에 따라 △퇴직 근로자 추가 특별위로금(167억 원)을 내년 정부 예산안에 반영하고, △대한석탄공사 소유부지 매입비 지원 △석탄산업 종사자 추모공원 조성 △화순탄광 체험형 관광단지 개발계획 용역 추진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특히 고용창출 효과가 큰 대체산업 유치를 바라고 있으며 남부권 내국인 면세점과 카지노업이 가능하도록 배려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내년 말 폐광까지 불과 1년 1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폐광 활용방안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을 만들지 않을 경우 화순탄광이 자칫 장기 폐광상태로 남을 수도 있다.
폐광지역을 역사문화와 접목하고 대형 상업시설을 유치한다면 지역의 관광명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폐광지역을 잘 활용해 지역경제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 시킨 선진지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해로 117살을 맞은 화순탄광. 길고 긴 역사만큼이나 탄광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리고 지역민들과 고락을 함께 해온 곳.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화순탄광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화순탄광은 1934년 첫 채굴을 시작한 뒤 채광 노동자의 피와 땀이 뒤범벅된 굴곡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화순광업소는 종연탄광과 남선탄광이 모태이다. 종연탄광은 1905년 박현경이 발견해 광업권을 취득한 뒤 1908년 일본인 야마쿠치가 광업권을 사들여 채광이 이뤄진다.
남선탄광은 1915년 일본인 다이마루가 광구등록을 한 뒤 1935년 일본인 기무라가 남선탄광주식회사를 창립해 구암삼거리 위쪽 갱도개발을 시작했다.
종연탄광과 남선탄광은 일본이 패망하자 탄광노동자들은 바로 자치위원회를 구성, 탄광을 운영했다. 당시 자치위원회는 노동자와 지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생산성도 일제 강점기보다 오히려 높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미군정은 두 탄광을 강제로 점령해 화순탄광으로 통합운영했다. 이에 반발하는 노동자는 해고시켰다.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광복 1주년인 1846년 8월15일 광주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미군은 화순 너릿재를 넘는 노동자들을 탱크와 비행기까지 동원해 강제로 진압했다. 탄광노동자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행진을 이어가자 미군은 비행기 총격으로 수십 명을 죽게 만들고 수백 명을 다치게 만들었다.
이 화순탄광노동자 학살사건은 미군정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이 압살 당하는 이데올로기의 비극이다.
1950년 11월 1일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면서 화순탄광은 석탄공사 산하 화순광업소로 운영되고 있다.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 실시된 이후 대다수의 광업소가 폐광됐고, 지금은 화순광업소와 함께 전국에서 단 4개의 광업소만 운영되고 있다.
화순탄광은 930만평의 면적에 17개의 광구를 두고 있다. 총 매장량은 4,200만 톤으로 전국 매장량의 2,9%, 대한석탄공사 총 매장량의 15.3%에 해당한다.
화순탄광의 일제강점기 최대 생산량 기록은 1944년에 25만톤이었으나 해방 후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1963년에 64만 톤, 1989년 70만 5천 톤 생산 기록을 세웠다. 이후 정부의 감산정책으로 생산량이 급감해 2000년에 들어 35만 톤 생산에 그치더니 지난해엔 7만5200t으로 완전히 줄어들었다. 1500명이 넘던 노동자 수도 지금은 272명에 불과하다.
화순탄광은 산업의 현대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왔으나 에너지 수요가 변화해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더 이상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내년 말 폐광되는 운명을 맞았다.
폐광 방침에 따라 화순 탄광의 근로자 고용승계와 대체산업 개발 기반조성, 주변 마을 지원대책 등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화순탄광이 폐광되면 당장 광업소와 협력업체 근로자 300여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그 가족 등 900여 명이 타지역으로 유출될 것으로 전망되는 등 지역경제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화순군은 이에 따라 △퇴직 근로자 추가 특별위로금(167억 원)을 내년 정부 예산안에 반영하고, △대한석탄공사 소유부지 매입비 지원 △석탄산업 종사자 추모공원 조성 △화순탄광 체험형 관광단지 개발계획 용역 추진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특히 고용창출 효과가 큰 대체산업 유치를 바라고 있으며 남부권 내국인 면세점과 카지노업이 가능하도록 배려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내년 말 폐광까지 불과 1년 1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폐광 활용방안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을 만들지 않을 경우 화순탄광이 자칫 장기 폐광상태로 남을 수도 있다.
폐광지역을 역사문화와 접목하고 대형 상업시설을 유치한다면 지역의 관광명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폐광지역을 잘 활용해 지역경제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 시킨 선진지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해로 117살을 맞은 화순탄광. 길고 긴 역사만큼이나 탄광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리고 지역민들과 고락을 함께 해온 곳.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화순탄광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여균수 기자 dangsannamu1@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