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에 의병 양방매여사와 국사봉
강병연 한국청소년인권센터 이사장
입력 : 2020. 06. 18(목) 18:25

강병연 한국청소년인권센터 이사장
[문화산책] “꿈에서조차 그리던 나라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철천지원수의 총칼에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오호 애재라, 내 혼백과 육신의 혈흔이라도 이승의 청강석이 되어 못 다한 천추의 한을 풀리다.”
위 내용은 의병장 강무경이 대구형무소에서 해방의 한을 풀지 못하고 32세의 청춘을 형장의 이슬로 순국되기 직전에 썼던 글이다.
의병장 강무경(1878~1910)은 전북 무장면 (현재 무주군 설천면) 출신으로 한학을 익힌 선비였지만 국운이 기울어가자 집을 나서 필묵상을 하면서 호남 일대를 다니며, 일제를 등에 업고 날뛰는 일제 앞잡이들의 횡포에 울분을 삼키면서 우국지사들과 교분을 맺으며, 평소 존경해왔던 우국지사 심남일로부터 의병활동을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고 전남 함평에서 의형제를 맺고 의병 모집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 호남지역에서는 1907년 9월 연합의병 부대를 기삼연 의병장이 의병부대를 이끌었고,
김율 의병장은 참모로 활약하고 있었다. 1908년 2월 기삼연 의병장과 김율 의병장이 순국하면서, 강무경은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의병 활동의 선봉장이 되었다.
1908년 강진 오치동 전투에서 일본 군경과 일제 앞잡이들로 구성된 부대와 전투를 하여 적 수십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으며, 그 기세에 영암,나주.장흥,화순,해남등에서 적 10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강무경이 의병 활동중에 부상을 입고 심남일과 함께 영암군 금정면 분토리의 선비 양덕관의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유숙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1908년 9월 양덕관의 둘째딸인 양방매(1890~1986)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구국의 일념에 불탔던 의병장 강무경을 남편으로 내조하다가 1909년 3월부터 남편 부대에 오빠 양성일과 함께 가담하여 영암,장흥,강진,해남,광양등 산악전에서 홍일점 여성 의병으로 활약을 펼치게 되었으나, 의병으로 활약하던 오빠 양성일이 20세의 청춘으로 순국하는 안타까움을 당하게 되었다.
보성 천동 전투후 양방매의 남편인 강무경 장군은 1909년 5월 석호산에서 여러 의진에 통문을 띄워 연합전선 구축을 기획하였으나 1909년 7월 순종의 의병해산 칙령이 전달되어 1909년 9월 5일 영암군 금정면 고인동에서 의병을 해산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때 강무경장군과 함께한 심남일 의병장은 ‘고인동산군/장수와 군사들 쓸쓸히 이별 눈물 뿌리고/고인산 떠나는 말조차 더디구나/왜적을 없앨 날 언젠가 있으리니/지난 삼년 맹세한 일 부디 잊지 마세’라는 한탄의 시를 남기게 되었다.
의병을 해산한 후 강무경은 부인 양방매 의병과 심남일 대장과 함께 신병 치료를 위해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윗굴(현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화학산 기슭)에 은거 하였다.
석굴은 마을에서 1km 떨어진 곳으로 의병들이 일본 군경의 눈을 피해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몰래 제공하였으나 1909년 10월 9일 강무경 의병장은 부인 양방매 의병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악형을 당하면서도 일본군에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병 양방매 여사와 국사봉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옥중에서 숨진 유관순 열사는 우리 고장의 인물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보다 20여년전에 총을 들고 일제와 맞서 싸웠던 의병 양방매 여사는 우리 고장의 전남 영암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져 가는지 모르겠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남편 강무경 의병장과 오빠 의병 양성일과 함께 의병 가족이면서 첫 여성 의병인 양방매 여사를 기리고자 한다.
의병 양방매(1890~1986)여사는 영암군 금정면 국사봉 자락에서 태어나 의병장 강무경이 의병 활동중에 부상을 입고 영암군 금정면 분토리의 양방매의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유숙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1908년 9월 의병장 강무경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양방매 여사는 신혼의 단꿈도 꾸지 못한채 남편을 따라 오빠 양성일과 함께 의병 활동에 나서게 되어 큰 공적을 세우는 의병 활동을 하였으나 결혼 1년여만에 의병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강무경 장군은 일본군의 가진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끝내 1910년 9월 1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하늘에 한을 품은채 순국하였다. 1962년 3월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1973년 10월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되었다.
한편 의병 양방매 여사는 옥중에서 벙어리 행세를 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어린 여자이기에 훈방되어 친가로 돌아와 평생 숨어서 살아야하는 또하나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양방매 여사는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하였으며, 영암 금정 반계 마을과 국사봉(614m) 산속에서 항상 수저를 가지고 다니면서 밥을 먹고 다른 남자들과는 식사를 하지않은 독특한 성품으로 수절하며 살다가 1986년 9월 향년 96세로 생을 마감 하였다. 2005년에 국내 첫 여성 의병으로 인정받아 여성 독립운동 유공 건국포장을 수상 하였으며, 현재는 국립묘지의 남편 강무경의 묘소에 합장 되었다. 사적비는 강무경 의병장의 고향인 무주군 설천면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여성 의병 양방매 여사의 업적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의 숭고한 삶이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위 내용은 의병장 강무경이 대구형무소에서 해방의 한을 풀지 못하고 32세의 청춘을 형장의 이슬로 순국되기 직전에 썼던 글이다.
의병장 강무경(1878~1910)은 전북 무장면 (현재 무주군 설천면) 출신으로 한학을 익힌 선비였지만 국운이 기울어가자 집을 나서 필묵상을 하면서 호남 일대를 다니며, 일제를 등에 업고 날뛰는 일제 앞잡이들의 횡포에 울분을 삼키면서 우국지사들과 교분을 맺으며, 평소 존경해왔던 우국지사 심남일로부터 의병활동을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고 전남 함평에서 의형제를 맺고 의병 모집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 호남지역에서는 1907년 9월 연합의병 부대를 기삼연 의병장이 의병부대를 이끌었고,
김율 의병장은 참모로 활약하고 있었다. 1908년 2월 기삼연 의병장과 김율 의병장이 순국하면서, 강무경은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의병 활동의 선봉장이 되었다.
1908년 강진 오치동 전투에서 일본 군경과 일제 앞잡이들로 구성된 부대와 전투를 하여 적 수십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으며, 그 기세에 영암,나주.장흥,화순,해남등에서 적 10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강무경이 의병 활동중에 부상을 입고 심남일과 함께 영암군 금정면 분토리의 선비 양덕관의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유숙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1908년 9월 양덕관의 둘째딸인 양방매(1890~1986)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구국의 일념에 불탔던 의병장 강무경을 남편으로 내조하다가 1909년 3월부터 남편 부대에 오빠 양성일과 함께 가담하여 영암,장흥,강진,해남,광양등 산악전에서 홍일점 여성 의병으로 활약을 펼치게 되었으나, 의병으로 활약하던 오빠 양성일이 20세의 청춘으로 순국하는 안타까움을 당하게 되었다.
보성 천동 전투후 양방매의 남편인 강무경 장군은 1909년 5월 석호산에서 여러 의진에 통문을 띄워 연합전선 구축을 기획하였으나 1909년 7월 순종의 의병해산 칙령이 전달되어 1909년 9월 5일 영암군 금정면 고인동에서 의병을 해산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때 강무경장군과 함께한 심남일 의병장은 ‘고인동산군/장수와 군사들 쓸쓸히 이별 눈물 뿌리고/고인산 떠나는 말조차 더디구나/왜적을 없앨 날 언젠가 있으리니/지난 삼년 맹세한 일 부디 잊지 마세’라는 한탄의 시를 남기게 되었다.
의병을 해산한 후 강무경은 부인 양방매 의병과 심남일 대장과 함께 신병 치료를 위해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윗굴(현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화학산 기슭)에 은거 하였다.
석굴은 마을에서 1km 떨어진 곳으로 의병들이 일본 군경의 눈을 피해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몰래 제공하였으나 1909년 10월 9일 강무경 의병장은 부인 양방매 의병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악형을 당하면서도 일본군에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병 양방매 여사와 국사봉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옥중에서 숨진 유관순 열사는 우리 고장의 인물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보다 20여년전에 총을 들고 일제와 맞서 싸웠던 의병 양방매 여사는 우리 고장의 전남 영암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져 가는지 모르겠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남편 강무경 의병장과 오빠 의병 양성일과 함께 의병 가족이면서 첫 여성 의병인 양방매 여사를 기리고자 한다.
의병 양방매(1890~1986)여사는 영암군 금정면 국사봉 자락에서 태어나 의병장 강무경이 의병 활동중에 부상을 입고 영암군 금정면 분토리의 양방매의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유숙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1908년 9월 의병장 강무경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양방매 여사는 신혼의 단꿈도 꾸지 못한채 남편을 따라 오빠 양성일과 함께 의병 활동에 나서게 되어 큰 공적을 세우는 의병 활동을 하였으나 결혼 1년여만에 의병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강무경 장군은 일본군의 가진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끝내 1910년 9월 1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하늘에 한을 품은채 순국하였다. 1962년 3월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1973년 10월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되었다.
한편 의병 양방매 여사는 옥중에서 벙어리 행세를 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어린 여자이기에 훈방되어 친가로 돌아와 평생 숨어서 살아야하는 또하나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양방매 여사는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하였으며, 영암 금정 반계 마을과 국사봉(614m) 산속에서 항상 수저를 가지고 다니면서 밥을 먹고 다른 남자들과는 식사를 하지않은 독특한 성품으로 수절하며 살다가 1986년 9월 향년 96세로 생을 마감 하였다. 2005년에 국내 첫 여성 의병으로 인정받아 여성 독립운동 유공 건국포장을 수상 하였으며, 현재는 국립묘지의 남편 강무경의 묘소에 합장 되었다. 사적비는 강무경 의병장의 고향인 무주군 설천면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여성 의병 양방매 여사의 업적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의 숭고한 삶이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광남일보@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