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라는 말, 참으로 불편하다
강경호 시와사람 발행인
입력 : 2025. 05. 15(목) 17:47
강경호 시와사람 발행인
[문화산책]‘엘리트’(elite)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쓴다. 사전적 의미로 엘리트는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점점 불편하게 다가온다.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는 표현은 흔히 명문대를 졸업하고 요직을 거치며 승진 가도를 달린 경력을 뜻한다. 그래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은 앞날도 전도양양하다고 여긴다. 특히 ‘12·3 내란 사태’ 이후 내란 가담자들을 법적으로 단죄하는 과정에서 ‘엘리트’라는 호칭이 더 자주 등장해 국민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다. 군 지휘관의 경우 특정 사관학교 출신으로 주요 보직을 거쳐 빠르게 진급한 사람들, 관료의 경우 특정 대학 법대 출신으로 선망 받는 직책을 지낸 사람들을 가리킬 때 ‘엘리트’ 혹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들만의 선민의식으로 결속된 카르텔(kartell)이 존재한다. 그들은 출신이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킨다. 이로써 우리 사회에는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특정 학교·특정 업종이 계급을 형성해 불신을 조장하고, 그 힘은 때로 폭력으로, 때로 노골적인 불평등으로 발현된다. 독점적 인맥 구조가 ‘엘리트’라는 말마저 무색하게 하는 셈이다.

우리가 믿어 온 ‘엘리트’란,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는 엘리트들의 명석한 머리가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모두가 평등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리라 믿어 왔다. 그런데 지난겨울을 지나 봄이 저무는 지금, 우리는 ‘진짜 엘리트’가 아닌 가짜 엘리트들 때문에 나라가 분열과 혼란에 빠진 현실을 목도한다.

그들은 국가의 운명이나 국민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정의와 평화가 무너져 위협받고, 수십 년 전 야만의 시대로 회귀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질곡의 근현대사를 지나며 우리는 정의·평화·민주주의를 쉽게 얻어 본 적이 없다. 가짜 엘리트의 욕망에 맞서, 진짜 엘리트인 평범한 시민들이 그것들을 쟁취하고 지켜 온 나라, 바로 우리의 역사다. 그들은 특정 대학을 따지지 않고 기득권이나 카르텔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엘리트’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엘리트이면서도 엘리트 의식을 내세우지 않기에 오히려 진정한 엘리트라 할 수 있다. 우리 문단에서도 출신 대학을 묻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오직 문학적 성과만을 바라본다.

한국 문학사를 빛낸 이들 중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거나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래서 문학 사회에는 ‘끼리끼리’ 문화가 없다. 문학 작품이 유일한 촉매이자 유대의 기반이다. 그들은 세력을 만들지 않고, 오직 추구하는 세계에 자기 삶을 걸고 진력을 다한다.

그들의 삶이 아무리 곤궁해도 지고(至高)한 아름다움을 향한 상상력을 발현하며,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는 문학인만의 일이 아니다. 다른 예술 영역에도 세속적 욕망에 연연하지 않고 헐벗음과 외로움 속에서 한국 미술사를 빛낸 숱한 작가가 있다. 부귀와 권력을 탐하지 않고 인간 정신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형상화한 이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 불굴의 의지로 삶을 불태운 작가들 덕분에 우리의 역사는 전진했다.

오늘도 수익이 되지 않는 소극장에서, 숱한 고뇌 끝에 아름다운 인간상을 되살리고자 대본을 수없이 외우고 연기를 연습하는 이름 없는 배우들이 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은 많은 이들에게 삶의 본질과 존재 방식을 묻고 답하게 할 것이다. 목이 터져라 가락을 익히며, 수천 년 이어 온 우리 민족의 정서와 풍류를 새로이 잇는 어린 학생들과 국악인들도 나는 잊지 않는다. 물질적 풍요를 얻기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꿋꿋이 걸어가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더욱 아름답다.

그들은 부자가 아니며, 큰 권력도 없지만 결코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러니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편파적인 판결도 하지 않을 것이다.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비인간적 행동을 하지 않고, 부당한 방식으로 투기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을 회복하며 유토피아를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언론에서 쓸모없이 남용되는 ‘엘리트’라는 말, 참으로 거북하고 불편하다. 이제 그 말을 제 자리, 곧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야 한다.
광남일보@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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