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사 출신 작가 ‘성산계류탁열도’ 원본 첫 공개 주목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 이사장 산문집에 게재
‘학탄여적…’ 통해 공개 "통일 염원 나누기 위해"
기존 목판본 대신 눈길…무등산·기행 등 3부 구성
입력 : 2026. 09. 17(목)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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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계류탁열도’ 원본
1590년 삼복의 어느 날 일군의 선비들이 영정, 서하당, 환벽당 등 담양 성산(星山)으로 불리는 일대에서 시회를 열며 더위를 씻는 풍경을 담은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 현재까지는 ‘성산계류탁열도’를 목판본으로만 접해왔다. 그런데 이 원본이 수록된 산문집이 나와 주목된다. 최근 광주를 연고로 열악한 출판문화를 이끌어온 문학들에서 역사교사 출신 산문작가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 이사장이 펴낸 세번째 산문집 ‘학탄여적-학여울에서 역사를 생각하다’가 그것이다. 두번째 산문집 ‘역사 앞에서’ 이후 10여년 만에 출간했다.

이 산문집은 그동안 서하 김성원의 ‘서하당유고’나 저자의 12대조 할아버지인 창랑 정암수의 ‘창랑유집’에 목판본으로만 실려 있던 그림의 원본 보다는 목판본을 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산문집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만큼 독자들의 큰 관심을 받을 전망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별지로 실렸다.

표제에서 ‘역사’를 명기하는 것만 보더라도 저자가 시대에 대한 담론을 펼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성산계류탁열도’ 원본의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이 산문집의 진가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을 터다.

‘성산계류탁열도’가 세상에 나오된 이면에는 1589년 기옥축사 이후 대규모 정치 숙청작업의 주 대상이었던 호남과 영남의 사림 전체였다. 생존이 걸린 풍전등화의 시기였던 셈이다. 이때 퇴계 문하에 있던 원로 학자 설월당 김부륜이 영남 선비들과 함께 담양 성산을 찾게 된 것이 ‘성산계류탁열도’의 태동 배경이다. 김부륜 일행을 서하당 김성원과 김사로, 최경회, 양자정 등 성산권 호남 사림이었다. 그래서 ‘성산계류탁열도’는 엄혹한 시대 오늘날로 보자면 ‘성산 사림 네트워크’가 구축된 것을 그림과 글로 남겨둔 것이다. 식영정에 모여 시회를 펼치는 장면으로 11명의 선비, 그리고 갓을 쓴 유생 19명, 시종 16명이 등장하며, 그림 상단에는 배경으로 성산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환벽당과 식영정 등이 배치돼 있다.

‘성산계류탁열도’라는 제목 다음으로는 ‘사우’(四憂) 김복억, 설월 김부륜, 일휴당 최경회, 기오헌 오운, 부훤당 양자정, 서하당 김성원, 창랑정 정암수, 매헌 정대휴, 환벽당 김사로,석월헌 김영휘, 학송헌 임회’의 이름을 적고 ‘만력萬曆경인庚寅 하夏 6월六月 복일伏日’이라 썼다. 그림 왼편에는 설월당 김부륜과 기오헌 오운의 시와 함께 ‘그해 초겨울 두루마리에 시축을 따라 지었다’는 서하당 김성원의 설명이 적혀 있다.

정규철 이사장의 이번 책은 학여울과 무등산에서 출발해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과 선현들의 정신세계를 두루 살피는 역사·기행 산문집이다. 표제에서 쓰인 ‘학탄’(鶴灘)은 저자의 고향인 화순 적벽의 학탄리, 곧 학여울을 이른다. ‘여적’(餘滴)은 글을 다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남은 먹물을 뜻한다.

이 산문집은 무등산과 기행, 산행 등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 ‘서석에 기대어’는 무등산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에게 무등산은 광주 사람들의 뒷동산인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기대며 살아온 생존의 보루이자 역사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공간으로 무등산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조선 선비의 지조와 동학농민군의 저항, 1980년 5월 광주의 희생을 차례로 불러낸다.

산문집 표지
교육자 출신 저자 정규철 작가
산행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저자 정규철 작가
특히 ‘대둔사 승려 호의 대사’는 학탄리 출신 승려 호의 시오의 생애와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등과의 교유를 살피면서, 다산의 친필 자료와 ‘두륜청사’를 통해 지역사 속에 묻힌 인물을 복원하고 있다.

이어 제2부 ‘기행’에서는 한반도 밖으로 시각이 넓어진다. 철원 DMZ에서는 전쟁이 남긴 경계가 역설적으로 야생 동식물의 터전이 된 모습을 만난다.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 윤봉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러시아 하바롭스크·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안중근·이상설 등 독립운동가들과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를 되새긴다.

또 제3부 ‘선현의 산행기’에는 초정 박제가의 ‘묘향산 기행’과 율곡 이이의 ‘비로봉에 올라서-풍악산 유람기’가 실려 있다. 선인들의 산행기 중 백미로 손꼽히는 글들이다.

책 말미에는 이영희의 ‘광주민주항쟁 배후조종 영광기’가 5·18 관련 사료로 묶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조사를 받고, 석방된 뒤에야 자신이 이른바 ‘광주 폭동 배후조종자’로 발표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게재 이류로 “금강산과 묘향산을 떠올리면서 통일의 염원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라고 작가의 말에서 이미 밝힌 정 이사장은 “고미술품 경매 때 목판본에서 봤던 진본이 나왔는데 그 소장자에게 대여를 해서 싣게 된 귀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 이사장은 “남북이 꽉 막혀 있어서 큰 일이다. 한미관계 등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지역에 조선시대 문학 산실인 성산에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하던 풍경을 담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다. 실제 보면 목판본하고 진본은 전혀 다르다”고 전했다.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 이사장은 1942년 화순 동복 출생으로 전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전대사대부중고와 전남여고 등 36년여를 교단에 재직했으며, 1980년 5·18항쟁으로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역사의 수레를 밀며’와 ‘역사 앞에서’ 등이 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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