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로 5·18민주화운동이 다시금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 책의 주인공인 ‘동호’와 비슷한 연령대의 피해자가 도청 내부에 또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이 소년이 주검으로 발견될 당시 가슴에 품고 있던 책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5·18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1980년 5월27일 신군부의 포고령으로 투입됐던 계엄군의 무자비한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됐다.

당시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A씨(81)는 이날 오전 6~7시께 자신이 담당했던 동향보고를 위해 도청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목격한 도청 내부의 모습은 참혹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이후 수습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곳곳에는 계엄군 총탄에 희생된 시민들이 피범벅이 된 채 숨져 있었다. 회계과 앞에는 7~8구의 주검이, 구내식당 주변에는 10여구의 주검이 뒤엉켜 있었다.

이중 한 주검에 시선이 머물렀다.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두 손을 모은 채 가슴에 책 한 권을 품고 숨져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소년의 두 손을 조심히 내려놓고 주검이 품고 있던 책을 황급히 옷 속에 숨겼다. 계엄군에게 발각되면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이후 A씨가 집에 도착해 꺼내본 책은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소년의 피로 흥건했던 책은 한 면은 영어로, 한 면에는 번역본이 실려 있었고, 책 곳곳에는 소장자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메모와 밑줄 등이 기록돼 있었다.

1980년 옛 전남도청에 주검으로 발견된 10대 학생이 가슴에 품고 있던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A씨는 이 책의 존재를 숨겨 오다 지난 2016년 3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했다. 지금은 기록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현재 서적은 변색되고 남아 있던 혈흔이 세월의 흔적에 대부분 지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이 5·18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A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난다. 당시 책을 안은 채 숨져 있던 소년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좋은 세상이 오면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 책을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5·18조사위에서 도청에서 발견된 시신들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하는데 책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해당 서적에는 소장자의 이름 등이 적혀 있지 않은 탓에 책 주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5·18기록관도 올해 초 서적에 묻은 혈흔으로 유전자 감식을 했으나 시간이 많이 흘렀고, 혈흔이 서적에 말라붙어 소장자를 밝혀내지 못했다.

원순석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소년이 온다’로 5·18민주화운동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동호’의 모티브가 된 문재학 열사와 같은 소년이 80년 5월에 더 있었다”며 “소설을 통해 당시 불의에 저항했던 모습이 표현됐지만 ‘동호’와 같은 소년들이 더 많이 발굴돼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