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구성 탄탄…사려깊은 감성 ‘천착’
유희춘 ‘미암일기’ 행간 되살리다
소설가 김현주씨 첫 장편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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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일상…굴곡진 삶의 호흡 호출
조성국 시인 5시집 ‘해낙낙’ 출간
입력 : 2023. 09. 25(월) 17:42
중견 소설가와 시인의 작품을 소개한다. 소설가 김현주씨의 첫 장편 ‘붉은 모란 주머니’와 조성국 시인의 제5시집 ‘해낙낙’이 그것이다. 김 소설가의 장편에서는 ‘미암일기’를 근간으로 소설가만의 독창적 서사로 풀어내는 스토리의 골격에 눈길이 가고, 조 시인의 시편들은 우리네 굴곡진 삶의 감성들을 톡톡 건드려 깨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전업의 길로 접어든 가운데 창작에 매진해왔다. 각자 자신만의 독창적 작품성을 구축하고 있다. 모처럼 소설과 시집을 읽으며 깊어가는 가을 감성을 충전해보기를 희망한다.





·유희춘 ‘미암일기’ 행간 되살리다

··소설가 김현주씨 첫 장편 선보여



중견 소설가 김현주씨의 첫 번째 장편소설 ‘붉은 모란 주머니’(다인숲 刊)가 출간됐다. 이 장편은 제6회 담양송순문학상 수상작 ‘연계정 대숲소리’를 새롭게 고친 작품으로, 미암일기에 대한 발견과 희열로부터 촉발됐다는 설명이다. 미암일기는 조선시대 학자였던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생애 후반부인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간 매일 쓴 일기로 1963년 보물 제260호에 등록됐다는 것은 팩트다. 소설은 이 팩트를 근거로 미암일기 속 실존 인물과 정치적 사건을 참고로 구성했으며, 미암 유희춘의 일기를 비롯해 송덕봉의 시와 편지, 상소문, 임금의 교지, 대신들의 편지에 대해 요약해 작은 글씨로 옮겼다. 또 방굿덕의 편지는 글쓴이가 지어내 작은 글씨로 옮겨놓고 있다. 작가만의 서사와 문체로 새로운 소설적 영토를 구축해내고 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미암일기’의 행간을 조망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16세기 선조 임금의 경영관이었던 미암 유희춘과 그의 부인 송덕봉, 첩 방굿덕의 이야기를 각각의 시점으로 그려냈다. 소설에는 당대의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유희춘의 관직생활과 일상사가 부인 송덕봉과 주고받은 시 및 편지로 디테일한 재미를 선사한다.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 방굿덕의 편지에는 사랑과 욕망의 절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가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네 딸을 기필코 양인으로 만들려는 어머니 방굿덕의 권세욕과 부귀영화를 향한 꿈이 ‘붉은 모란 주머니’로 상징된다. 더불어 조선의 여성 시인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주장했던 송덕봉의 생애 또한, 가을날 피는 노란 국화처럼 서늘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16세기 조선을 살았던 이들 두 여성, 각자의 삶은 진솔하면서도 열정적이다. 그럼에도 개성적인 인물은 방굿덕. 경제적 독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등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여성상은 이 소설의 매력을 더한다는 평이다. 이 소설이 현대성을 갖추게 된 중요한 지점으로 풀이된다.

작가는 당시 붕당정치를 고민했던 유희춘의 정치 철학과 백성을 걱정하는 애민 사상도 소설 곳곳에 그려 넣었다. 정치와 학문에 대한 근심으로 피와 살이 마르던 학자 유희춘의 고통은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읽힌다.

‘잡념이 모여 속울음이 되었다. 속울음이 빠른 물살이 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는 한없이 막막했다. 사는 일은 바다에서 홀로 노를 젓는 일처럼 외롭고 두려웠다. 희춘의 첫 유배지 제주 길을 배웅 나갔을 때 보았던, 파도의 끝없는 위태로움을 떠올렸다. 바닷길은 사방팔방 무한의 깊은 곳. 먹물 같은 새벽, 조용히 흔들리는 등잔불 앞에서 번민에 잠겼다. 잠들지 않는 바다처럼 몸을 뒤척였다.’

118쪽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희춘의 삶을 통해 세상의 파고를 미루어 짐작하는 동시에 당대 살아가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작가만의 감성적 문체가 가미돼 훨씬 더 스토리의 울림을 배가시킨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어느 겨울, 우연히 ‘미암일기’를 발견했다. 희열을 느꼈다. 눈 내리는 밤, 틈틈이 미암 선생의 일기를 읽는 일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담양 대덕을 가끔 찾았다. 연계정 뒤로는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 맑은 시내가 흐르고, 초록 언덕에는 노랑 상사화가 드문드문 피어 아련했다. 그 풍경을 보고 떠올린 첫 구상의 주된 인물은 송덕봉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어느 겨울, 우연히 ‘미암일기’를 발견했다. 희열을 느꼈다. 눈 내리는 밤, 틈틈이 미암 선생의 일기를 읽는 일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담양 대덕을 가끔 찾았다. 연계정 뒤로는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 맑은 시내가 흐르고, 초록 언덕에는 노랑 상사화가 드문드문 피어 아련했다. 그 풍경을 보고 떠올린 첫 구상의 주된 인물은 송덕봉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가 김현주씨는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1998년 계간지 ‘문학과 사회’로 등단, 창작집 ‘물속의 정원사’와 산문집 ‘네 번째 우려낸 찻물’을 펴냈으며, 제10회 광일문학상과 제6회 담양송순문학상을 수상했다.



김현주 소설가
·자연과 일상…굴곡진 삶의 호흡 호출

··조성국 시인 5시집 ‘해낙낙’ 출간



‘새봄에 피었다고는 하지만/작년이나 재작년, 재재작년과 똑같다//매년 딱 한번/어딜 나풀나풀 다녀왔는지 단체로 다녀오며/회포라도 푸는 것인지/흐드러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온다던 약속은 안 했으나/예약한 듯 때맞춰 돌아오시는 노거의 살구나무//…후략…’

이 시는 광주 출생 조성국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해낙낙’(시인의 일요일 刊)에 수록된 시 ‘그곳’의 일부다. 봄 한때 연분홍 꽃 이파리가 화사하게 한꺼번에 피는 모습을 사람의 봄 마실에 비유해 표현했다. 흐드러지는 것을 회포라도 푸는 우리네 삶에 비유한 것이다. 자연과 일상을 바라보며 삶의 한 토막을 끄집어낸 것이다.

시집을 넘기기 전 제목 때문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는 시집이다. ‘해낙낙’을 좀체 규정하기 어려워서다. 알듯 한데 쉽게 정의내리지 못한 아둔함이 더더욱 겉표지에 몰입한 배경이 됐다. 해낙낙은 사전적 의미로 마음이 흐뭇해 만족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적 내용을 꿰다 보면 마음이 흐뭇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서민들의 날 것 그대로의 삶의 파안대소가 그대로 노정되는가 하면, 그것이 부족해 주변의 격없는 선배 시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느닷없이 마음에 들어찼다가 비워지는 형국이다.

그는 시로 단련된 사람이다. 그만큼 시적 텃밭이 넓다. 그 텃밭에 늘 시를 부지런히 키우는 농사꾼과 흡사 닮았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농사꾼의 촉수를 건드리는 시편이 여럿 실렸다.

조성국 시인
‘전공 서적에서 배운 건 아니다/뒤란 대밭의 뿌릴 캐내고/대추나무 매실 단감나무 심고 냄새 가꾸는,//…중략…//외려 과수 한 톨 열리지 않는 해거리에도/밑거름 한번 더 주며 묵은 나뭇가지를 이발하듯 잘 다듬어준다’(‘아버지의 농사’ 일부)거나 ‘오이순 호박순 연초록 더듬이마다/진딧물이/다닥다닥 움질거리며 괴롭히는 것을 보고도 일부러 관둔다/약 한번 치려다/줄지은 숙주의 일개미 떼가 바지런히 넌출 끄트머리로/기어가는 중이어서 그냥 내버려 둔다’(‘주말농장’ 일부)고 노래한다.

그런데 묘하게 구사된 단어들이 한결같이 정겹고 오래된 우리네 삶의 정서를 톡톡 건드려 깨우는 듯하다. 흑백필름이 바래 더이상 낡을 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 색이 바랜 풍경이 아늑한 또 하나의 감성의 집을 짓는다. 이 시는 시적 기교가 전혀 없는데도 읽히는 맛이 융숭깊은 시편들이다.

그는 청년 시절 운동권이었다. 그를 뒷받침할만 시 ‘우스갯소리’에는 그의 대학시절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패기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수배 전단 인상착의 문안에/일견 미남형이라는 문구를 들먹였다 송기숙 선생님은/국가가 나를 미남으로 인정했다고 강조하며 주장하였다/그 거쿨지는 달변에 고갤 끄덕이는,/이적단체 고무하고 찬양한 데다가/적을 이롭게 하는 표현물 제작하고 배포해서 지명수배받은/내 생김새와 옷차림에는/국가를 전복시키는/극렬분자의 범죄형이라 표기되어서 그런 지 몰라도/밤낮없이 쫓기는 꿈만 자주 꾼다’고.

우스갯소리라고는 하지만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만큼 시적 세계는 시대의 엄혹함이 드러난다. 시대의 긴장감을 조금은 이완시켜 가보자 한 시적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조선대학교 재학 당시 학내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실형까지 살았다. 1990년에 수배 당시의 이야기를 ‘수배일기’라는 연작시 6편을 통해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당시 수배 전단의 인상착의 문안에 “일견 미남형”이란 문구를 보고, 1980년대 분단문학을 이끌던 송기숙 선생이 ‘국가가 인정한 미남’이라 했다는 일화를 시화했다.

조성국 시인은 광주 출생으로 시집 ‘슬그머니’, ‘둥근 진동’,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 동시집 ‘구멍집’, 평전 ‘돌아오지 않는 열사 청년 이철규’ 등이 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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