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발굴·조명은 미래세대 위한 것"
[남도명인] 이범기 전남문화재연구소장
대학 재학 때 유물에 반해 문화재 연구 현재 이르러
2014년 개소 출범 10년 된 연구소 초창기부터 참여
마한문화 교과서 수록 기초작업·유네스코 등재 목표
입력 : 2023. 06. 22(목) 17:07
이범기 전남문화재연구소장은 “우리 지역은 문화유산이 많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 주변의 유·무형 문화유산들을 발굴, 조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제르바이잔 살비르유적을 발굴 중인 이 소장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유물 발굴에 참여해 땅을 파고, 전공 서적을 뒤적이던 똑같은 하루. 그런데 그의 눈에 유물이 하나 띄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예뻐 보였다. 둥근 형태가 돋보이는 뚜껑을 덮을 수 있는 접시. 그릇 아랫단에 뚜껑을 받칠 수 있도록 돌출된 단과 몸통을 덮을 수 있는 모양새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개배’였다. 이날부터 그는 개배가 어떻게 사용됐고 어느 지역에 주로 분포됐는지, 출토된 개배마다 색깔은 왜 다 다르며 보존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개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다. 그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뒤지기도 하고, 연구자들에 직접 조언을 구했다. 책에서 사진으로나 박물관에서 어렵지 않게 봐왔던 개배가 그날따라 그의 시선을 붙들었던 이유는 뭘까.

전남문화재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이범기 소장이 유물에 반해 문화재 연구자로 발을 내딛은 때다. 대학생이던 그는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 개배를 만나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서 하루 하루 시간을 소중히 보내게 됐다.

이 소장은 전남도 출연 문화재 연구 전문기관으로 지난 2014년 초 문을 연 전남문화재연구소가 개소 준비를 하던 당시부터 현재까지 연구소와 함께하고 있다. 지역 문화재의 체계적인 보존 관리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전남문화재연구소가 개소한 이후 이제 막 10년을 넘어섰는데 그 시간을 동고동락한 것이다.

“발굴 현장을 다니고 연구해서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열정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일이죠. 그러면 개배에 꽂힌 때를 떠올려요. 저도 모르게 ‘와, 이쁘다’ 탄성이 흘러나왔던 첫 감정을 떠올리는 거죠. 그 유물에 고맙죠.”

연구소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선별해 ‘왜 가치 있는가’를 조명한다. 이것은 곧 이 지역을 살았던 선조들의 뿌리를 찾는 일이고, 지역 문화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10년 동안 중요문화재 역시 늘었다. 연구소 개소 당시 중요문화재는 국보 20개, 보물 167개, 도·시·군 지정 문화재 735개 등 1100여 개 등이었는데, 10년이 지난 현재는 국보 23개, 보물 195개, 도·시·군 지정 문화재 774개 등 1150여 개로 증가했다. 전국 문화재 가운데 전남은 8%로 경기 2279개(15.8%), 경북 2201개(15.3%), 서울 1937개(13.5%), 경기 1165개(8.1%)에 이어 5번째로 많다.

영암 내동리 쌍무덤 현장을 설명 중인 이 소장
이 소장이 해남 일평리 주거지 발굴조사 현장을 둘러보며 설명 중인 모습
그는 전남지역 문화재의 특징으로 다양한 형태의 고분을 꼽았다. 여러 고분을 볼 수 있는 곳이 영산강 인근으로 무덤 안에 부장품이 거의 없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백제는 54개 소국으로 구성된 마한의 부족국가였는데 힘을 키워 마한의 땅에서 나라를 세웠고, 마한 문화의 중심지이자 발상지가 영산강 유역이기 때문이다.

“옹관의 경우 현대 기술로 못 만들 정도로 그 당시 최첨단 기술력을 보유했던 거예요. 보수적인 문화인 고분이 다양한 형태라는 점은 각 부족들의 개성이 강하고 서로 문화를 존중할 줄 알았다는 것을 뜻한다 할 수 있죠. 조사하면 할수록 비슷한 것 같은데 다 달라요. 다 다른 것 같은데 비슷하기도 해 흥미롭죠.”

그가 몸담아온 연구소는 개소 직후 산성과 고분에 대한 유적정비 등 학술발굴과 서남해 바닷길을 통한 한국·중국·일본과의 고고역사 규명을 시작으로 도내 고고학과 고대사 관련 학술발굴 및 대회, 지역 문화재 관련 학술지 발간, 호남학 연구, 문화재 체험·답사·강좌 등을 다각도로 펼쳐왔다. 이 가운데 문화재 연구는 마한문화권 유적 발굴 조사·연구, 역사적 가치 고증·정체성 확립, 학술조사·역사문화자원DB 구축 등에 초점을 맞춰왔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 중엽까지 800여 년 역사의 부족국가 마한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섬진강을 경계로,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 동쪽으로는 강원도 일부와 충남·북까지 걸치고 있다. 마한의 유산은 광주를 포함해 나주와 영암 등 전남 전역에 퍼져 있다.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역사문화자원특별법)의 마한역사문화권에 지역이 들어가면서 관련 사업 진행에 탄력이 붙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된 마한사를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발굴 자료부터 현재까지 전남지역 마한 생산·패총유적 자료를 정리해 집성한 총서를 발간했다. 연구총서 발간은 전남의 ‘영산강유역 마한문화권 개발사업’을 통해 2018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진행 중이다. 2019년 전남의 마한유적, 2020년 전남의 마한 분묘유적, 2021년 전남의 마한 취락유적에 이어 이뤄낸 성과다.

올해는 5개년 계획의 마지막인 전남의 마한 관방유적을 발간하기 위한 연구·조사를 진행한다.

“연구하다 예산이 끊기면 공백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러다 다시 중요성이 부각돼 연구를 하려고 하면 공백이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어요. 그럼 진짜 때가 왔을 때 우리 문화유산이 조명받기 어려워지는 거죠. 그래서 이 점에 유의하면서 사업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해남 일평리 주거지 발굴조사 현장
영암 내동리 쌍무덤에서 출품된 유물을 설명 중인 이범기 소장
지난달 영암고에서 진행된 마한역사문화교육
특히 올해부터는 장기적인 호흡으로 마한문화를 조명, 사적지정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구체적으로는 마한문화를 교과서에 수록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한다. 현재 마한에 관한 내용은 한 두줄에 그치고 있어서다. 전남도는 행정과 예산을, 연구소는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마한을 다각도로 조명해나간다. 또 등록된 국가사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수월하기 때문에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지역 유물들의 국가사적 등록에 힘을 쏟고 있다.

이외에도 도내시범사업으로 교육을 운영 중이다. 마한역사문화 교육 초청강연 ‘어?! 마한(馬韓) 이야기’가 그것으로, 스타강사가 22개 시·군의 고등학교를 방문해 역사문화 개론 및 인식을 제고, 마한에 관한 이해와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첫 시간은 지난 5월12일 ‘삼국 속에 잊혀진 왕국 마한’이라는 주제로 최태성 이투스교육 강사가 영암고에서 진행했으며, 7월까지 나주(봉황고·나주고)와 순천(청암고), 해남(해남고), 광양(중마고) 등을 찾아 마한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아울러 해상 내륙을 잇는 마한문화자원을 활용한 관광코스 개발과 문화 경쟁력 가치 창출을 위해 답사 프로그램도 추진한다.

‘마한, 해양 실크로드 답사’라는 타이틀로 7월 시작, 오는 11월까지 마한 해양 실크로드 유적과 권역별 타문화권 답사 등을 실시한다. 구체적으로는 지역 마한문화를 조명하는 일반인 대상 답사, 백제·신라·가야문화권 등 선진지 견학과 타 문화를 비교하는 전문가 대상 답사 등으로 나눠 각각 진행해나가고 있다.

이 소장은 문화유산을 발굴, 조명하는 게 미래세대를 위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 지역은 문화유산이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으니 소중한 지 모르죠.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 주변의 유·무형 문화유산들을 발굴, 조명해야 하죠. 외지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보러 이곳을 찾는 일이 늘어나고 그것은 곧 관광과 연계돼 미래세대의 먹거리가 될 테니까요. 미래를 내다보면 문화유산은 훌륭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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