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섬을 가다]제국주의 첨예한 대결장 ‘거문도’
<12>역사를 품은 섬-거문도
영국군 점령 후 해군사령관 이름 따 ‘포트해밀턴’ 명명
일본 사세보~제주도 연결 해상케이블 중심지로 부상
항로상 요충지·물자 수송 중간보급지…열강세력 눈독
입력 : 2019. 07. 21(일) 17:08
1885년 4월15일 영국이 불법점령해 거문도에 건설한 상하이에서 거문도간 해저케이블로 일본 사세보와 중국 따렌, 제주와 고흥, 부산을 잇는 중심지로 부상했다.
1885년 건설돼 지금까지 130년이 지났지만 생생하게 남아있는 거문도와 상하이간 해저케이블.
거문도 등대는 남해안 최초의 등대로 1905년 세워진 뒤 100년동안 남해안의 뱃길을 밝혀왔다.
거문도 등대는 남해안 최초의 등대로 1905년 세워진 뒤 100년동안 남해안의 뱃길을 밝혀왔다.
영국에 이은 일제의 강점으로 거문도에 1938년 세워져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곤삐라신사의 모습.
국내 최초의 테니스장이 건설된 거문도 해밀턴 테니스장.
해밀턴항이라고 명명하고 점령했던 영국군은 묘지를 남기고 떠나가고 그 앞에 거문도 항구가 펼쳐져 있다.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1945년 항복했다. 한국은 해방됐고, 일본은 점령지로 변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8일 일본에서의 군정을 종식 시키기로 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을 일본과 체결한 것이다.

‘평화조약’이라고 부르는 이 협정으로 인해 전범국 일본은 패전 6년만에 통치권을 확보,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됐다.

그 평화조약 제2조 제1항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퀄파트, 포트해밀턴, 다줄레 섬에 대한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것도 1951년에 맺어진 국제적 공식문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생소한 단어이지만 부끄러운 역사를 말하고 있다.

퀄파트는 지금의 제주도를 말하고, 포트해밀턴은 거문도를 말하고 다줄레는 울릉도를 말한다.

포트해밀턴(Hamilton)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대영제국의 전함 사마랑(Samarang)호의 함장 에드워드 벨처가 영국 해군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조선의 거문도를 명명한 이름이다.

다줄레(Dagelet)는 1787년 프랑스의 라 페루즈 탐험대가 울릉도를 최초로 실측해 그들의 지도에 넣은 이름이다.

그러나 그때 독도도 같이 거론됐다면 일본은 더 이상 독도로 인한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나 여기에서 거론되지 않았다고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중적인 침략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해밀턴항, 바로 여수시 삼산면에 소속된 거문도를 말한다. 1842년 영국이 대규모 함선과 대포를 가지고 청나라를 굴복시켜 홍콩을 얻어낸, 아시아에서 식민제국시대의 서막을 연 장본인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r)가 거문도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영국해군사령관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 러시아와 일본 등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홍콩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항로상의 지점인 거문도에 중간보급항구를 만들어 석탄을 포함한 항해에 필요한 물자의 보급항구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1800년대의 증기기관의 발명이라는 산업혁명으로 서구제국들은 경쟁적으로 자국의 식민지를 만드는데 혈안이 됐다. 도자기와 차, 비단으로 축적된 중국의 돈을 빼앗고자 일으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시설과 보급시설을 만들 필요에 부응, 1845년 거문도를 발견하고 영국의 필요에 의해 어느 때든 점령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해 1885년 4월 15일 영국군함 3척에 부속선 등 6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거문도를 무단으로 불법으로 점령했던 것이다. 불법으로 침략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거문도와 상하이 사이에 해저케이블을 부설하는 것이었다. 그 후 거문도는 해저케이블의 중심지로 부상, 일본 사세보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케이블도 또한 건설됐다.

거문도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795년 암행어사 정만석의 서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이 삼도(三島: 동서, 서도, 고[왜]도)라고 해 왜구를 소탕하고 수군기지를 설치했다고도 한다. 현지에 사는 원래의 주민들은 거문도라고 하면 잘 모른다고 했다. 대개가 삼도라고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력으로 청나라를 굴복시킨 대영제국의 필요에 의해 우리의 땅인 거문도가 1845년 해밀턴항으로 명명되고 1885년 무단점령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시에도 우리의 거문도가 해밀턴으로 불린 것이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거마도(巨磨島), 해밀톤(哈米敦)이라고 하면서 영국 침략을 이용, 실속만 추구했다. 제독 정여창이 학자들이 많은 섬이라고 해서 거문도라고 하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근거가 없다. 당시에 김류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고 정여창이 주민들과 접촉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거문도에 주목한 또 다른 가장 큰 세력은 영국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부동항 확보를 열망하던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52년 푸챠친(Putyatin) 해군 중장을 동아시아의 전권사절단으로 파견했다. 그의 임무는 중국의 5개 개항장에서 러시아의 통상권을 획득하는 한편 일본을 개항시켜 이권을 챙기는 일이었다.

그는 1852년 10월 팔라다호(Pallada)를 타고 발틱해를 출발, 중국과 통상권을 교섭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과의 개항교섭에서도 미국에 밀려났다. 그래서 필리핀 마닐라로 가서 배를 수리해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가기 위해 푸챠친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러시아함대의 집결장소로 조선의 해밀턴 항구를 지정했다. 그는 제주도나 남해안을 탐사하지 않고 곧바로 거문도로 직행했다.

1854년 4월 2일(양력) 거문도에 도착한 뒤 7일까지 6일간 거문도에 머물렀고 이후 1857년 8월 1일에도 방문했다. 그 때 러시아도 거문도를 해밀턴항이라고 했다.

영국 잡지인 “The Graphic”지를 통해 거문도가 소개됐다. 당시 영국인들은 거문도에 일본인 매춘부 유곽을 두고 점령군으로서 분탕질을 했다. 그러면서 조선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훔치는 버릇이 있다고 야만으로 몰아붙였다.

일본은 증기선의 원만한 운항을 위해 일정한 곳에 석탄을 저장할 필요성을 느껴 조선정부에 석탄고 설치를 요구했다. 석탄고가 설치되지는 않았지만 거문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동아시아에 관련된 열강의 공통적인 관심사였다.

영국, 러시아, 일본, 미국의 제국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항로상의 요충지가 바로 거문도였다. 그것을 선점한 것이 영국이었다. 거문도는 홍콩과 블라디보스톡을 연결하는 중간보급기지로서, 영국함선에 제공할 보급물자와 석탄고를 설치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였다.

제주도 점령도 고려해 ?파트에 상륙하자 주민들이 한라산으로 피신하고 당시 유배 중이던 추사 김정희도 깜작 놀랐다고 했다. 그러나 거문도가 훨씬 훌륭한 항구이고 방어에도 용이하며 주민의 저항도 거의 없다고 평가됐기 때문에 무단 불법 무력으로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이 석유를 사용하는 엔진으로 바뀜에 따라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도 또한 변했다. 그것을 간파한 영국은 23개월만인 1887년 2월 27일 거문도에서 물러갔다.

타국이 거문도에 진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영국군은 철수하였지만, 주둔지에 무덤을 두는 관행으로 인해 거문도에는 영국군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영국군이 물러가자 조선정부는 거문도에 진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행정지명으로 거문도라고 했다.

그 이후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거문도에 눈독을 들이는 세력은 없었다. 남해안에 외로운 섬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풍파를 가장 거세게 맞은 전라도의 아픈 손가락으로 존재하고 있다.
광남일보@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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