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정문 골목 ‘미리내 분식’ 김복순씨
"산다는 게 뭐 있어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게 행복이지"
입력 : 2016. 07. 08(금) 12:23

전남대학교정문골목3평남짓비좁은공간서38년째 미리내분식 을운해온김복순씨는 손님이줄어도즐겁고평생을즐겁게일할수있는곳이있다는게행복 이라며 옛학 생들이추억을가지고이곳을다시찾을수도있어자리를지키고싶다 고말한다.
3평 남짓 비좁은 공간서 38년째 분식점 운영하며 학생들 맞아
1978년 탁자·의자 각 3개로 시작…현재 3남1녀 모두 출가시켜
"손님 줄어도 거동 못할때 까지 이곳 지킬 것…정을 팔고 싶어"
세월의 더께를 간직한 ‘미리내 분식’이라는 주황색 간판이 아련한 기억들을 되살린다.
1978년 전남대학교 정문 골목 귀퉁이에 문을 연 이곳은 근처 식당들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십 번 ‘새 간판’으로 갈아 입었지만 여전히 예전 그대로다.
마주 앉아 식사하기 힘든 세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따닥따닥 붙어 앉아 라면을 ‘맛있게’ 먹는 대학생들의 풍경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전남대를 다녔거나 정문 근처에서 종종 식사를 해본 사람에게 있어 이곳은 전남대 정문 최고의 ‘음식명가’다.
정이 듬뿍 담긴 푸짐한 라면은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단순한 라면이 아닌 수십년 골목 한 켠에서 켜켜이 쌓아온 추억까지 동시에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여든한 살이 된 김복순씨는 이곳의 산 증인이다. 맛있게 끓이는 라면조리 솜씨와 푸짐한 인정을 38년째 자랑하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9년 대학 시절 많이 다녔던 분식점. 오늘은 고3 아들 녀석과 다녀갑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좁디 좁은 식당 왼쪽 벽에는 ‘미리내에게 건네는 편지’라는 메모판이 있다.
여기에는 초등학생에서부터 60대 손님의 다양한 메모가 담겨 있다.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30년의 추억을 간직한 단골 손님들이 잊지 않고 찾아 또 다른 추억을 써내려 가는 곳이기도 하다.
"출세하고 다 찾아와. 누가 찾아올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여길 떠나."
실제로 서울, 전주 등 타지로 취업했던 학생들이 광주에 오면 미리내를 찾아와 "저 000인데 기억하세요? "라고 묻는다고 한다.
선배를 따라 드나들던 국수 가게에 어느새 큰 딸을 대동하고, 20년 만에 와서 ‘그때 그 국수’를 달라고 하는 손님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곳만의 특별한 비결이 한 몫 했다.
‘음식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는 말처럼 힘들었던 시절 곪은 배를 따뜻하게 채워줬던 손맛과 정성, 따뜻한 ‘정’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7일 15년 만에 이곳을 찾은 서종갑씨(37)는 자취를 하던 당시 저녁마다 김씨가 끓여준 국밥을 먹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취직했지만 그 시절의 ‘맛’과 ‘정’을 잊을 수가 없어 이날 장성에 출장 왔다 저녁에 짬을 내 이곳을 찾았다. 푸짐한 국밥 한 숟가락을 뜨던 서씨는 "지금도 ‘밥 더 먹어 뭐 더 줄 까’라고 묻던 김 씨의 따뜻함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10~60대가 추억을 공유하는 전남대 정문의 명소 ‘미리내분식’이 탄생한 것은 1978년 여름이었다.
당시 3남1녀를 키우며 공사판 막노동, 목수일, 식당 허드레 일 등 안 해본 게 없었던 그의 삶은 지난 했다.
신안동 210-2번지. 지금의 전남대 정문 치킨 거리에 있던 중화요리점이 세를 내놓는다는 소문을 들었던 김씨는 분식집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단 번에 계약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장사는 무슨 장사"라며 곧장 달려가 해약을 했다. 가게를 38년 지킨 고집쟁이답게 그는 되돌아가 다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은 미리내 분식에 해당 되는 말이었을까.
처음 장사는 탁자 3개, 의자 3개로 시작했다. 가게가 긴 직사각형 모양이어서 주방 쪽 탁자에서 먹던 사람이 나가려면 가운데와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사람 모두가 일어서야 했다. 그만큼 비좁았다. 하지만 맛과 양 그리고 인심 좋다는 소문에 세 팀이 먹고 있으면 다섯 팀이 줄 서서 기다릴 만큼 장사가 잘 됐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3남 1녀 모두 남 부럽지 않게 시집· 장가를 보낼 정도였다.
"하루에 국수 세 박스 씩 팔았다니까. 학생들이 저기 밑까지 줄 서서 기다리다 먹고 갔지. 참 이상해. 돌아가는 사람 없이 그렇게 줄 서서 먹고 가니까"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며 학생들이 줄 서 있었던 문 밖을 바라봤다.
학생들을 미리내로 이끌었던 비결에 대해 "손맛이지. 학교 끝나고 학생들이 배고플 것 같으니까 언능 해달라는 것 해줬지. 배부르게 해 준 것 밖에는 없었는데"라고 말하며 "속을 채워 주고 싶은 마음뿐 이었다"고 덧붙였다.
지금도 그는 모든 걸 ‘한 손’, ‘한 움큼’으로 해결하고 있다.
"한 손에 가득 차면 그게 정량"이라며 국수 한 주먹 집어 들어 뜨거운 물에 투척하고 참기름 발린 김 가루 한 움큼 집어 국수 위에 얹는다.
"30년 전 학생들은 배가 아주 많이 고팠어. 요즘 식당가면 ‘1인 1 주문’ 이런 게 있다 매. 그게 다 뭐야. 뭐든 배불리 먹고 나눠 먹으면 되지. 그때는 모두 돈 없는 시절이니 학생들이 집에서 밥을 싸오면 나는 라면 하나 푸짐하게 끓여 줬어"
"아들 같은 남학생들이 오면 뭐든 곱빼기로 줬지. 나도 아들 셋을 키워 봤잖아. 라면으로 양이 차겄어? 그래서 밥 좀 줘? 라고 물어봐. 국물에 밥까지 말아 싹싹 비우고 가면 젤로 예뻐"라고 말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따뜻한 정을 나눈 학생들이 그의 가족이고 친구였다. 20년 전 장사가 잘돼 전대 정문 삼거리에 있는 1층 넓은 곳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단골 학생들이 말리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을 나누는 곳이 미리내지" 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이사 계획을 접었다고 한다.
그 후 학생들은 좁은 공간을 어떻게 잘 활용할 지를 고민했다. 그 고민 끝에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 졌다.
학생들은 직사각형 공간이기 때문에 양옆으로 긴 탁자를 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냈고 김씨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양옆으로 긴 탁자를 설치하고 그 밑에 단을 하나 더 만들어 학생들이 가방을 놓을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더니 10명 이상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삶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 학생은 졸업 후 엄마가 만들어 준 열무김치 한 상자를 가져 오기도 하고, 또 다른 학생은 소화에 좋다며 직접 담은 매실주를 챙겨 왔다고 한다.
"학생들이 너무 착했어. 나 혼자 일을 하니까 먹은 그릇 다 정리해서 주방에 딱 갖다 주고. 첫 월급 탔다고 박카스 사다 주는 학생도 있었고, 옷까지 사다 주기도 했지. 참말로 큰 힘이 됐어. 학생들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어떻게 장사를 해 왔을지 상상할 수 없어" 라고 말을 이었다.
그에게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년 전 그는 장사가 잘 되는 것을 시샘한 옆 고깃집 사장의 신고로 경찰서며 법원을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미리내 단골 이었던 학생들(?)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루는 조사받으러 북부 경찰서에 갔는데 어떤 높은 양반이 다가오더니 ‘미리내 할머니 맞으시죠. 할머님 저 할머니 라면 먹으며 자랐잖아요’라고 말을 걸며 선처를 해줬어".
그리고 또 하루는 법원에 갔더니 한 검사가 미리내 단골이었다며 인사하더니 그의 자초지종을 듣고 도와줬다고 한다.
"참 별꼴이 다 있어.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이렇게 대우를 받아. 참말 복순이지"라고 즐거워 한다.
학교 부근에 원룸촌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학교 안에 더 저렴하게 파는 분식집도 생기면서 미리내 손님은 줄어 들었다.
"요즘 학생들은 허름한 곳에 잘 안 와. 손님이 줄어도 나는 즐거워. 평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행복이지. 여기를 지켜야지. 옛 학생때 추억을 가지고 이곳을 찾을 텐데 있어야지"
나이 든 홀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이제는 그만했으면 하는 자식들의 설득에도 그는 막무가내다.
"38년 지킨 내 보금자리가 최고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싶어.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힘든 시간 다 이겨내고 얼마나 즐거웠는데…"
앞으로도 학생들 속을 따뜻하게 하며 여생을 살고 싶다는 김씨는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계란을 애끼지 말고 많이 넣어야 돼. 라면은 푸짐해야 허고. 맛이 변하면 나는 죽지. 옛날 맛을 찾아오니까. 그게 다 추억이고 사는 보람이랑께"
박사라 수습기자
1978년 탁자·의자 각 3개로 시작…현재 3남1녀 모두 출가시켜
"손님 줄어도 거동 못할때 까지 이곳 지킬 것…정을 팔고 싶어"
세월의 더께를 간직한 ‘미리내 분식’이라는 주황색 간판이 아련한 기억들을 되살린다.
1978년 전남대학교 정문 골목 귀퉁이에 문을 연 이곳은 근처 식당들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십 번 ‘새 간판’으로 갈아 입었지만 여전히 예전 그대로다.
마주 앉아 식사하기 힘든 세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따닥따닥 붙어 앉아 라면을 ‘맛있게’ 먹는 대학생들의 풍경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전남대를 다녔거나 정문 근처에서 종종 식사를 해본 사람에게 있어 이곳은 전남대 정문 최고의 ‘음식명가’다.
정이 듬뿍 담긴 푸짐한 라면은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단순한 라면이 아닌 수십년 골목 한 켠에서 켜켜이 쌓아온 추억까지 동시에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여든한 살이 된 김복순씨는 이곳의 산 증인이다. 맛있게 끓이는 라면조리 솜씨와 푸짐한 인정을 38년째 자랑하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9년 대학 시절 많이 다녔던 분식점. 오늘은 고3 아들 녀석과 다녀갑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좁디 좁은 식당 왼쪽 벽에는 ‘미리내에게 건네는 편지’라는 메모판이 있다.
여기에는 초등학생에서부터 60대 손님의 다양한 메모가 담겨 있다.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30년의 추억을 간직한 단골 손님들이 잊지 않고 찾아 또 다른 추억을 써내려 가는 곳이기도 하다.
"출세하고 다 찾아와. 누가 찾아올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여길 떠나."
실제로 서울, 전주 등 타지로 취업했던 학생들이 광주에 오면 미리내를 찾아와 "저 000인데 기억하세요? "라고 묻는다고 한다.
선배를 따라 드나들던 국수 가게에 어느새 큰 딸을 대동하고, 20년 만에 와서 ‘그때 그 국수’를 달라고 하는 손님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곳만의 특별한 비결이 한 몫 했다.
‘음식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는 말처럼 힘들었던 시절 곪은 배를 따뜻하게 채워줬던 손맛과 정성, 따뜻한 ‘정’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7일 15년 만에 이곳을 찾은 서종갑씨(37)는 자취를 하던 당시 저녁마다 김씨가 끓여준 국밥을 먹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취직했지만 그 시절의 ‘맛’과 ‘정’을 잊을 수가 없어 이날 장성에 출장 왔다 저녁에 짬을 내 이곳을 찾았다. 푸짐한 국밥 한 숟가락을 뜨던 서씨는 "지금도 ‘밥 더 먹어 뭐 더 줄 까’라고 묻던 김 씨의 따뜻함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10~60대가 추억을 공유하는 전남대 정문의 명소 ‘미리내분식’이 탄생한 것은 1978년 여름이었다.
당시 3남1녀를 키우며 공사판 막노동, 목수일, 식당 허드레 일 등 안 해본 게 없었던 그의 삶은 지난 했다.
신안동 210-2번지. 지금의 전남대 정문 치킨 거리에 있던 중화요리점이 세를 내놓는다는 소문을 들었던 김씨는 분식집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단 번에 계약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장사는 무슨 장사"라며 곧장 달려가 해약을 했다. 가게를 38년 지킨 고집쟁이답게 그는 되돌아가 다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은 미리내 분식에 해당 되는 말이었을까.
처음 장사는 탁자 3개, 의자 3개로 시작했다. 가게가 긴 직사각형 모양이어서 주방 쪽 탁자에서 먹던 사람이 나가려면 가운데와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사람 모두가 일어서야 했다. 그만큼 비좁았다. 하지만 맛과 양 그리고 인심 좋다는 소문에 세 팀이 먹고 있으면 다섯 팀이 줄 서서 기다릴 만큼 장사가 잘 됐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3남 1녀 모두 남 부럽지 않게 시집· 장가를 보낼 정도였다.
"하루에 국수 세 박스 씩 팔았다니까. 학생들이 저기 밑까지 줄 서서 기다리다 먹고 갔지. 참 이상해. 돌아가는 사람 없이 그렇게 줄 서서 먹고 가니까"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며 학생들이 줄 서 있었던 문 밖을 바라봤다.
학생들을 미리내로 이끌었던 비결에 대해 "손맛이지. 학교 끝나고 학생들이 배고플 것 같으니까 언능 해달라는 것 해줬지. 배부르게 해 준 것 밖에는 없었는데"라고 말하며 "속을 채워 주고 싶은 마음뿐 이었다"고 덧붙였다.
지금도 그는 모든 걸 ‘한 손’, ‘한 움큼’으로 해결하고 있다.
"한 손에 가득 차면 그게 정량"이라며 국수 한 주먹 집어 들어 뜨거운 물에 투척하고 참기름 발린 김 가루 한 움큼 집어 국수 위에 얹는다.
"30년 전 학생들은 배가 아주 많이 고팠어. 요즘 식당가면 ‘1인 1 주문’ 이런 게 있다 매. 그게 다 뭐야. 뭐든 배불리 먹고 나눠 먹으면 되지. 그때는 모두 돈 없는 시절이니 학생들이 집에서 밥을 싸오면 나는 라면 하나 푸짐하게 끓여 줬어"
"아들 같은 남학생들이 오면 뭐든 곱빼기로 줬지. 나도 아들 셋을 키워 봤잖아. 라면으로 양이 차겄어? 그래서 밥 좀 줘? 라고 물어봐. 국물에 밥까지 말아 싹싹 비우고 가면 젤로 예뻐"라고 말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따뜻한 정을 나눈 학생들이 그의 가족이고 친구였다. 20년 전 장사가 잘돼 전대 정문 삼거리에 있는 1층 넓은 곳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단골 학생들이 말리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을 나누는 곳이 미리내지" 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이사 계획을 접었다고 한다.
그 후 학생들은 좁은 공간을 어떻게 잘 활용할 지를 고민했다. 그 고민 끝에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 졌다.
학생들은 직사각형 공간이기 때문에 양옆으로 긴 탁자를 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냈고 김씨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양옆으로 긴 탁자를 설치하고 그 밑에 단을 하나 더 만들어 학생들이 가방을 놓을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더니 10명 이상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삶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 학생은 졸업 후 엄마가 만들어 준 열무김치 한 상자를 가져 오기도 하고, 또 다른 학생은 소화에 좋다며 직접 담은 매실주를 챙겨 왔다고 한다.
"학생들이 너무 착했어. 나 혼자 일을 하니까 먹은 그릇 다 정리해서 주방에 딱 갖다 주고. 첫 월급 탔다고 박카스 사다 주는 학생도 있었고, 옷까지 사다 주기도 했지. 참말로 큰 힘이 됐어. 학생들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어떻게 장사를 해 왔을지 상상할 수 없어" 라고 말을 이었다.
그에게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년 전 그는 장사가 잘 되는 것을 시샘한 옆 고깃집 사장의 신고로 경찰서며 법원을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미리내 단골 이었던 학생들(?)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루는 조사받으러 북부 경찰서에 갔는데 어떤 높은 양반이 다가오더니 ‘미리내 할머니 맞으시죠. 할머님 저 할머니 라면 먹으며 자랐잖아요’라고 말을 걸며 선처를 해줬어".
그리고 또 하루는 법원에 갔더니 한 검사가 미리내 단골이었다며 인사하더니 그의 자초지종을 듣고 도와줬다고 한다.
"참 별꼴이 다 있어.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이렇게 대우를 받아. 참말 복순이지"라고 즐거워 한다.
학교 부근에 원룸촌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학교 안에 더 저렴하게 파는 분식집도 생기면서 미리내 손님은 줄어 들었다.
"요즘 학생들은 허름한 곳에 잘 안 와. 손님이 줄어도 나는 즐거워. 평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행복이지. 여기를 지켜야지. 옛 학생때 추억을 가지고 이곳을 찾을 텐데 있어야지"
나이 든 홀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이제는 그만했으면 하는 자식들의 설득에도 그는 막무가내다.
"38년 지킨 내 보금자리가 최고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싶어.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힘든 시간 다 이겨내고 얼마나 즐거웠는데…"
앞으로도 학생들 속을 따뜻하게 하며 여생을 살고 싶다는 김씨는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계란을 애끼지 말고 많이 넣어야 돼. 라면은 푸짐해야 허고. 맛이 변하면 나는 죽지. 옛날 맛을 찾아오니까. 그게 다 추억이고 사는 보람이랑께"
박사라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