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의식
강경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입력 : 2026. 04. 02(목)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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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불을 발명한 이후 수천 년의 간극을 넘어 마침내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인류는, 이제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최첨단 하이테크 시대를 맞고 있다. 인공지능이 그만큼의 편리와 효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류는 농경사회의 삶의 방식에 바탕을 둔 아날로그적 상상력으로 살아왔고, 순전히 인간의 상상력으로 역사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우리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문명의 변화 앞에서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앞으로 어떠한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인지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지능’은 본래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스스로를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발전시켜 온 능력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지능마저 ‘인공화’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미래 앞에서, 정작 그 미래를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가져다주는 순기능보다도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오용하는 인간의 운용 방식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도 인류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마다 노벨상을 시상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의 과학적 성과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또한 잘못된 방향으로 운용되는 사례가 수없이 나타나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의식은 예술 현장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노래와 무용을 만들고, 문학작품마저 순식간에 물건을 만들어내듯 뚝딱 해치우는 인공지능의 능력 앞에서, 그저 놀랍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과학문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헛된 망상일지 모르지만, 필자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문명 앞에서 오히려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루소의 명제가 공감되기도 한다.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마치 사찰의 가장 먼 곳에 해우소를 두었던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가는 아쉬움 같은 것이 아닐까.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아파트처럼 안방 가까이에 화장실을 두는 것이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우소까지 걸어가며 사색할 수 있었던 그 거리의 의미를 산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일로만 치부하기에는 곤란하다.
화가가 몇날 며칠 캔버스 앞에 서서 온몸에 물감을 묻혀가며,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형상화해 낸 작품에는 인간의 삶이 배어있다. 그러므로 화가의 숨결과 사유가 담긴 결과물 앞에서 우리는 때로 그 상상력에 놀라고, 깊은 사유 속에서 깨달음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그림에는 화가가 마주한 시간이 투사되어 있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한 정신성의 맥락이 엿보인다. 이렇듯 인류가 지금까지 이어 온 창작 방식은 인간의 땀이 묻어있어 감동에 젖게 한다.
이것은 화가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이 창작한 수많은 명곡에는 그의 고뇌가 깃들어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경험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소설이나 시가 여전히 읽히는 것도 치열한 삶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경험을 예술로 형상화한 작품들은 인간적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런데 인간의 숨결이 투사된 손길을 외면한 채, 인공지능을 이용해 감쪽같이 상품을 찍어내듯 만든 작품 아닌 작품들이 창작물로 발표되거나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공모전이나 신인상, 또는 문예지에 인공지능을 이용해 제작한 가짜 작품들을 버젓이 응모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기어코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글이 문예지 신인상이나 문학상에 당선되었다가 뒤늦게 인공지능으로 만든 것이 들통나 당선이 취소되거나, 제명된 문인들이 생겨나는 불상사도 있었다.
필자가 펴내는 문예지의 신인상 문학평론 응모작 가운데에도, 사전에 적발되어 아예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 경우가 있었다. 제외된 이 응모작은 응모자가 시놉시스를 작성한 뒤, 분석할 작품과 함께 인공지능에게 제시하여 글을 쓰도록 명령한 결과물에 응모자가 가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눈과 평론을 전개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글의 밀도는 낮고 논리는 바로 결론으로 도약하는 양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인공지능과, 보는 눈 없이 그것을 첨삭한 응모자의 협업으로 작성된 글은 신인상에 응모하는 초보자의 글답지 않게 일정한 밀도를 유지하고, 문장구조도 얼핏 완벽해 보이지만, 그 논리는 모순되거나 공허하여 결국 기괴한 글이 되고 말았다.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경험보다 요약 위주로 접근하여 보고서처럼 작성되어 인간적 직관과 집착이 보이지 않는, 인공지능 글쓰기의 전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태를 보여준 신인상 응모자들의 윤리감각 앞에서 그저 통탄할 뿐이다.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뽑아내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윤리적인 태도로 문학을 대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은 앞에서 밝혔듯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인공지능을 만든 본래의 의도는 훼손될 수 있다. 지금은 그 기술을 둘러싼 인간의 허영과 탐욕을 더욱 우려해야 할 때이다. 이럴 때일수록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임을 모든 예술가는 되물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농경사회의 삶의 방식에 바탕을 둔 아날로그적 상상력으로 살아왔고, 순전히 인간의 상상력으로 역사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우리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문명의 변화 앞에서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앞으로 어떠한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인지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지능’은 본래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스스로를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발전시켜 온 능력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지능마저 ‘인공화’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미래 앞에서, 정작 그 미래를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가져다주는 순기능보다도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오용하는 인간의 운용 방식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도 인류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마다 노벨상을 시상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의 과학적 성과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또한 잘못된 방향으로 운용되는 사례가 수없이 나타나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의식은 예술 현장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노래와 무용을 만들고, 문학작품마저 순식간에 물건을 만들어내듯 뚝딱 해치우는 인공지능의 능력 앞에서, 그저 놀랍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과학문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헛된 망상일지 모르지만, 필자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문명 앞에서 오히려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루소의 명제가 공감되기도 한다.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마치 사찰의 가장 먼 곳에 해우소를 두었던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가는 아쉬움 같은 것이 아닐까.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아파트처럼 안방 가까이에 화장실을 두는 것이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우소까지 걸어가며 사색할 수 있었던 그 거리의 의미를 산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일로만 치부하기에는 곤란하다.
화가가 몇날 며칠 캔버스 앞에 서서 온몸에 물감을 묻혀가며,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형상화해 낸 작품에는 인간의 삶이 배어있다. 그러므로 화가의 숨결과 사유가 담긴 결과물 앞에서 우리는 때로 그 상상력에 놀라고, 깊은 사유 속에서 깨달음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그림에는 화가가 마주한 시간이 투사되어 있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한 정신성의 맥락이 엿보인다. 이렇듯 인류가 지금까지 이어 온 창작 방식은 인간의 땀이 묻어있어 감동에 젖게 한다.
이것은 화가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이 창작한 수많은 명곡에는 그의 고뇌가 깃들어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경험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소설이나 시가 여전히 읽히는 것도 치열한 삶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경험을 예술로 형상화한 작품들은 인간적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런데 인간의 숨결이 투사된 손길을 외면한 채, 인공지능을 이용해 감쪽같이 상품을 찍어내듯 만든 작품 아닌 작품들이 창작물로 발표되거나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공모전이나 신인상, 또는 문예지에 인공지능을 이용해 제작한 가짜 작품들을 버젓이 응모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기어코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글이 문예지 신인상이나 문학상에 당선되었다가 뒤늦게 인공지능으로 만든 것이 들통나 당선이 취소되거나, 제명된 문인들이 생겨나는 불상사도 있었다.
필자가 펴내는 문예지의 신인상 문학평론 응모작 가운데에도, 사전에 적발되어 아예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 경우가 있었다. 제외된 이 응모작은 응모자가 시놉시스를 작성한 뒤, 분석할 작품과 함께 인공지능에게 제시하여 글을 쓰도록 명령한 결과물에 응모자가 가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눈과 평론을 전개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글의 밀도는 낮고 논리는 바로 결론으로 도약하는 양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인공지능과, 보는 눈 없이 그것을 첨삭한 응모자의 협업으로 작성된 글은 신인상에 응모하는 초보자의 글답지 않게 일정한 밀도를 유지하고, 문장구조도 얼핏 완벽해 보이지만, 그 논리는 모순되거나 공허하여 결국 기괴한 글이 되고 말았다.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경험보다 요약 위주로 접근하여 보고서처럼 작성되어 인간적 직관과 집착이 보이지 않는, 인공지능 글쓰기의 전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태를 보여준 신인상 응모자들의 윤리감각 앞에서 그저 통탄할 뿐이다.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뽑아내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윤리적인 태도로 문학을 대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은 앞에서 밝혔듯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인공지능을 만든 본래의 의도는 훼손될 수 있다. 지금은 그 기술을 둘러싼 인간의 허영과 탐욕을 더욱 우려해야 할 때이다. 이럴 때일수록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임을 모든 예술가는 되물어야 할 것이다.
강경호 gn@gwangnam.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