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사유에의 탐색…조형미학 정립 ‘온힘’
[남도예술인] 서양화가 김혁정
‘운주사 천불천탑’ 의미 재조명…서양미술 접목
파리 풍경 등 투영…희로애락과 생로병사 방점
"그림은 문학 그 이상의 언어 화면으로 보여줘"
입력 : 2025. 07. 23(수)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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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정 작가는 “그림은 문학 그 이상의 언어를 화면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느껴왔다”고 밝혔다.
작가는 전남대와 동 대학원을 거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파리 소르본느 1대학 조형미술학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래서 국내외 미술사에 대한 조예가 깊다. 국내로 돌아와서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창작활동을 병행했다. 귀국한 뒤 서울에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광주로 내려와 줄곧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남산단 내 작업실에서 매일 작업을 펼치고 있는 서양화가 김혁정씨가 그 주인공이다.

잠시 작업실을 둘러보고 자리에 앉아 그로부터 회화세계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회화는 그동안 펼쳐온 그의 작업에 대해 세 블럭으로 쪼개 접근해보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린다. 제1기는 1978년부터 1988년 무렵이고, 제2기는 1989년부터 1996년까지이며, 제3기는 1997년부터 현재까지다.

1기와 2기는 운주사 작업이 걸쳐져 있다. 작가에 따르면 화순 운주사가 널리 알려지게 된데는 관련 논문을 작성한데다 천불천탑의 회화작업을 처음으로 했기 때문이다. 또 운주사를 담은 논문이 동아일보 지면에 기사화돼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이다. 실측도 같은 것 역시 작가 자신이 거의 그렸다고도 했다.

그후 파리에 가 있는 동안 운주사 천불천탑에 관한 시(詩) 작품이나 회화 작품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1980년대 독일의 한 대학 교수였던 요한 힐트만의 ‘미륵’이라는 저서에 운주사와 관련해 미스 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데 그것이 자신이라는 후문이다. 프랑스 그랑팔레 단체전에서 작가는 와불이 일어서지 않아 국운이 다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판화 ‘일어선 미륵’이라는 작품을 선보인 것 역시 그에게 운주사가 갖는 각별한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화순 운주사가 나를 끌어 당긴 것이 아니라 내가 운주사를 보고 조형적으로 작업한 것입니다.”

그가 운주사 작업을 하게 된 배경의 일말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제1기 출발 전에는 대학시절이 놓여져 있다. 대학시절에 그는 대학미전 입상 등을 통해 경험을 쌓으면서 도전 특선(4회 수상)과 국전 입선까지 차지하는 등 자신감이 있었던 시기였다. 작가는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는 1978년 승주 주암고 교사로 처음 부임해 화순고 등에서 5년 동안 교직에 몸 담았다. 그가 5년 동안 교직에 있었던 것은 의무연한 5년이 있어서다. 1986년 도전 추천작가가 됐고, 조교를 하면서 시간강사로 대학에 출강했으며 1989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유학 시절 독일 만하임과 루드빅스, 그리고 파리 누벨 쁠라크 아뜰리에 17공방 등에서 전시를 연 바 있다. 1990년에 소르본 1대학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1992년에 수료했는데 그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염원’
‘천불동 인상’
이때 그의 회화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앞서 언급했듯 자신에게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운주사 천불천탑이었다. 파리라고 하는 공간에서 서양미술을 공부하게 됐지만 자신이 한국미술을 망라해 동양미술을 깊이있게 탐색하지 못했다는 깨우침이 발동되면서 운주사에 천착하게 됐다.

이런 일이 계기가 돼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가 불상과 탑 등의 공부에 집중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그 당시 작가는 자신이 미술교사이면서 동양미술, 이를테면 한국미술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되새기며 반성했다고 언급했다. 석사논문으로 운주사를 통해 조형 표현의 한 예를 석불과 석탑 군에서 모색했다.

지역미술계는 운주사를 모토로 작업이 시작됐거나 진행하고 있는 작가들이 여럿 있는데 모두 제각각의 개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작가는 다른 이보다 운주사의 불교미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제2기 때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 판화를 하면서 다시 운주사 작업에 몰입했다. 작가는 한국인의 정서를 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주사 불상과 석탑을 통해 희로애락을 표출하는데 주력했다. 더욱이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파리 에펠탑과 파리 사람들의 삶 그리고 풍경들을 운주사에 투영해 희로애락은 물론이고 생로병사까지 담아내고자 했다.

특히 파리에서 운주사에 대한 느낌과 한국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정서를 불상과 탑에 의존해 인간의 본성인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작업을 했었는데 동서양의 만남을 꾀한 셈이다.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현대미술의 큰 강줄기를 봤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몸짓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런 흐름을 배워왔다는 설명을 했다. 그리고 ‘조형이 문화예술적으로 어떤 호소력을 갖게 만들 것인가’ 등의 문제에 천착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제3기 때는 프랑스에서 귀국 전이 해당하며, 귀국 후 10년 동안 매년 서울에서 전시를 여는 것으로 국내 활동 포문이 열렸다. 건강상의 이유로 작업에 몰입하지 못했던 그는 ‘6년만의 외출’(2022.11.2∼8 서울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이라는 타이틀을 내걸며 다시 화단 활동에 돌입했다. 이래 저래 활동을 하던 무렵 2022년 광주과학기술원(지스트)의 초청으로 개관 기념 초대전(2022.12∼2023.1)이 열리면서 그의 고향에서의 활동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광주로 완전히 내려오면서는 서울로 좀체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전언이다. 다만 양림동 호랑가시나무창작소와 드영미술관, 생각상자 등 광주에서 초대전이나 개인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밝힌다.

“그러니까 중요한 거는 매년 쉬지 않고 전시를 해 왔거든요. 그것은 1년을 산 흔적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다작이란 말은 굉장히 듣기 싫더군요. 하다 보면 많은 작품이 만들어진 거죠. 이 작품들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조형 속에 살아 있는 것이 ‘과연 관객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것인가’라고 하는 명제에 대해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나누기 위해서 작업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그게 가능하다고 하면 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점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사계1’
‘꽃-여름’
여기서 그는 조형의 의미를 언급했다. 극히 추상적인 것이 사실적인 것이고, 극히 사실적인 것이 어느 부분에서는 추상성이 살아 숨쉬는 것이어서 추상과 사실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몸으로 그것이 조형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은 문학 그 이상의 언어를 화면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느껴왔다”는 그는 문학성이나 어떤 음악성도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며 젊은 날부터 보고 느끼면서 생각하던 바가 손끝으로 흘러나오게끔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드로잉이라는 설명이다. 그 드로잉 속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선들이 겹쳐져 면이 되고 형태가 돼서 하나의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등 한 화면을 만들어내는데까지 조형의 의미를 확장해 응시한다. 그렇게 할때 하나의 조형이 완성된다는 소신이다.

내년에 국윤미술관 전시가 예정돼 있는 가운데 붓을 놓지 않고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그가 다음 전시에서 어떤 조형성을 선물해줄지 기대된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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