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키운 예술의 꿈…구상·추상 넘나들며 한길
[남도예술인] 조각가 김왕현
비금도서 염전 접하며 성장, 예술적 감각 키우는데 도움
‘오월광주·DJ’ 등 서사 투영 잇단 발표…작업 변화 추구
다양한 재료로 작품 구현…관광차원서 지자체 더 관심을
입력 : 2025. 01. 09(목) 17:53
김왕현 미술관 전경.
조각가 김왕현 전 동신대 교수는 “기하학적인 미니멀한 형태는 내가 태어난 비금도의 천일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학에서 정년을 하고, 지금은 창작자로서의 삶을 살며 경기 화성과 전남 나주를 오간다. 경기도는 그가 대학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고등학교 교편을 잡던 곳으로 연고가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을 절반 정도씩 나눠서 경기도와 나주에 머무는 등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나주시 산포면에 있는 그의 작업실(김왕현조형미술연구소)을 방문했을 때 차분한 어조의 말투로 인사를 건네왔다. 주인공은 조각가 김왕현 전 동신대 조형예술과 교수가 그다. 평범한 원로처럼 보이지만 ‘오월광주’에 대한 작업 등 굵직한 서사가 투영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전남대 정문 앞 5ㆍ18민주화운동 표지석과 망월묘역 내 5ㆍ18민주화운동 헌수기념탑 등 5월 관련 다수 조형물이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여기다 2010년 제작한 고(故) 김대중 전(前) 대통령(1924∼2009) 동상 역시 그의 손을 거쳐 대중들에 선보였다. 그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상 전국 현상공모’에서 당선돼 청동과 대리석 4m50㎝ 높이에 이르는 DJ 동상을 서거 1주년(8·18)에 맞춰 김대중 광장에서 제막했다. DJ 동상의 틀은 여전히 그의 작업실 한켠에 보관 중이다. 이 작업을 할때 이희호 여사(1922∼2019)가 작업실을 방문해 작품을 둘러봤을 때가 생생히 기억이 난다고 술회했다.

‘김왕현표’라고 하는 뚜렷한 조각세계를 구축한 김 작가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의 조각가 모임으로 지난 1985년 창립돼 참여회원만 700여명에 이르는 (사)전국조각가협회 이사장을 맡아 활동을 펼치는 등 개인 작업 외에 조각 발전을 위한 노력을 잊지 않았다.

‘가족나들이’
‘함께 가는 삶’
‘연주회’
그는 신안 비금도 출생으로 염전을 보며 자란 덕에 조각가로서 온 생애를 살 수 있었다. 염전에는 수레차가 있어야 해서 목재가 많이 필요했다. 그 목재 등을 만지면서 조각에 필요한 촉감이 형성된 듯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술부가 있는 목포고에 진학한 뒤 이미 1학년 때 ‘조선대 중등학교 미술사생대회’에서 큰 상을 받으면서 ‘앞으로 미술을 해야 겠구나’ 하고 결심을 굳히게 된다.

“고등학교에 와서 제대로 배웠는데 찰흙으로 시작을 했어요. 또 대학에 가야하니까 찰흙을 익히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찰흙은 조각에서 가장 기본적 재료이기 때문에 소조인 찰흙을 안하고는 조각이 안되죠. 그러다가 나무조각을 했고, 조금 무리가 따르면서 허리가 아파서 고생한 적도 있고, 청동으로 한 작품 또한 있는 데 이것 역시 소조 작품들입니다.”

이처럼 나무나 찰흙, 청동, 석조를 거쳐 최근에는 스테인리스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조각 인생은 여러 재료들과 함께였다. 조각가로서 다양한 재료적 실험을 거듭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재료에 관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엇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거기에 맞는 재료를 선택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그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청동은 시간이 가면 검은 빛이 나고 어두워지는 등 각 재료가 갖는 특징 역시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경향 역시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마다하지 않았다.



‘Positive&Negative-03’
‘Positive&Negative-10’
<@7>

순전히 전남 출신인 그가 교직을 경기도로 선택한 이면에는 “큰 무대에서 놀아봐야 겠다”며 예술적 기질을 더 키우는 동시에 널리 알리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임용시험을 전남에서 보지 않고 경기도로 임용시험을 본 이유다. 그래서 처음 부임한 학교가 평택고였다. 이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며 예술가로서 작업을 하는, 두 가지의 삶을 살아내기 시작했다. 작가로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이 무렵 작품활동에 온 마음을 다해 임했다.

그는 ‘경기도미술대전’에서 조각으로 전체 1등 금상을 거머쥐는 영예를 안았다. 그때는 경기도 금상이었는데 경인일보에 대서 특필이 되고, 수도권 KBS 9시 뉴스에 방영될 정도였다고 한다. 1980년대 나주 동신대 교수로 옮겨오기 전까지 그의 수도권에서 작업 실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970년대와 1980년대 엽전이나 부구(일명 북통) 형태나 인체 등을 만지면서 스스로의 세계를 찾아나섰고 문화재적 작업에서부터 찰흙 작업에 이르기까지 작업 폭을 유지해가며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 내면의 이야기를 투영해 군상을 망라한 인물상 작업을 하는 등 주로 구상작업의 범주에 한때 머물렀다. 30여년 동안 꿋꿋하게 청동 작업을 해온 것이다. 현재는 재료로 스테인리스를 이용한추상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추상작업의 모티브는 그의 유년을 지배했던 천일염으로, 추상작업 전에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고향 비금도의 천일염을 깊이있게 관찰했다. 천일염에 천착하게 된데는 신안군이 소공원을 조성하면서 천일염 조형물을 의뢰해오면서다. 그래서 구체적 형상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결과, 직육면체라는 것을 알아낸 뒤 그것을 상징화한 기하학적 형태의 스테인리스 작품을 실험을 거쳐 완성, 미술계에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하학적인 미니멀한 형태는 내가 태어난 비금도의 천일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보통 작가의 작품이 바뀌어질 때는 자기 삶의 어떤, 특이한 상황이 있거나 큰 대작을 하는 과정에서 그렇거든요.”

<@8>올해 열린 ‘광주아트페어’에서 천일염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을 선보였다. 물론 그전에 그룹전에 출품해 시연을 했지만 대규모 전시장에서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트페어에 출품한 것을 계기로 해 관련 잡지에 게재, 널리 공개되면서 뉴욕 갤러리와 인연이 닿아 그의 작품은 국내를 넘어 해외미술시장 중심에서 선보이는 기회도 주어졌다. 뉴욕 소재 Paris koh fine art 갤러리에서 2026년 전시를 열기로 했다.

각 지자체들이 조각작품을 관광화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고, 실제 제안해오면 적극 응할 생각을 피력한 그는 마지막으로 조각 인구가 대폭 감소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그는 조각이 그림과 역할이 달라서 관광 차원에서 지자체 등이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고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들어서 친구들은 일흔이 넘어서고는 소일거리 없이 노년을 보내잖아요. 게다가 아프면 병원에 다니거나 요양병원을 가구요. 어쨌든 약 먹으면서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세계(예술작업)가 따로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또래 사람들은 그냥 시간을 흘러보내며 지내니까요.”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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