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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공부해야 영혼 가득한 그림 나오죠"
[남도예술인] 중견화가 허진 전남대 예술대학장
1990년 첫 개인전 이후 큰 반향…출강하며 창작활동 분주
묵시·다중인간·익명인간·유목동물 시리즈 등 변화 거듭
"뜨거운 가슴 가져야 눈물 날 정도의 감동 안긴다" 밝혀

2024. 04.11. 18:28:49

‘다중인간(多重人間)-동학균+서태지 이야기’(1993년)

“2000년대 초반 일본의 유서깊은 고대 역사 도시 나라에서 사람과 동물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에 익명동물이 어떻게 등장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익명동물 시리즈는 일본 교토 노무라미술관 전시 당시 같은 간사이 지역으로 경주같은 나라시의 풍경을 본데서 유래한다. 안견의 작품 ‘몽유도원도’가 나라현 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 전시 중이라는 말을 보태면서 시내에 사슴이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본 것이 유목 동물 작업의 발단이 됐다고 설명한다.

이는 한때 프로화가로 출발할 당시 개인전으로 인해 화단의 주목을 받아냈고, 그 이후 광주로 내려와 서울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화업 35년을 맞은 허진 교수(전남대 예술대학장·미술학과)의 이야기다.

그가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창작을 놓지 않은 이유 또한 그의 소신이 투영된 결과로 읽을 수 있다. 대개 작업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대학교수로 안착하면 작업을 놓아버리는 경우를 종종 봐 왔기에 (자신은)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작업 안하는 교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창작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겨온 것이다. 그는 교단에서 강의하는 것도 교육이지만 교수가 열심히 작업하고 발표하는 것이야말로 간접적이기는 하나 최고의 교육방식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다만 집안 배경으로 인해 치열하게 작업했다기 보다는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이해됐다. 그래서 그의 현재적 삶에서 교육과 창작은 어느 하나로 기울지 않고, 기차 레일처럼 평형을 이뤄 균등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했듯 사실 그는 대학 교수로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오기 전 주목받는 젊은 화가였다. 전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 관람했을 뿐 아니라 당시로는 흔치 않게 유료 팸플릿 300∼400매가 다 동이 났을 만큼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회고한다. 그 자신 역시 지금까지 제1회 개인전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유지해 왔다. 1990년 열린 첫 개인전 때 그의 전시를 접한 송희경 이화여대 초빙교수의 글에서 ‘그때의 전시가 어땠는가’가 잘 드러난다.

송 초빙교수는 1990년 그의 첫 개인전을 관람했던 장본인 중 한 명으로, ‘뫼비우스적 노마드’(Mobius Nomad)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소재 베카갤러리에서 열린 허진 교수의 초대전(2022.10.26∼11.15)에서 다시 조우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송 초빙교수는 제1회 개인전을 계기로 한 작가의 이후 행보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설명이다.

‘달려라 슬퍼맨1’(1995년)
‘默示(묵시)5’(1989년)
“학생 시절이던 1990년 한 작가의 개인전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화의 현대성을 고민하던 터라 더욱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서른도 안된 젊은 오빠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중략)…운림산방의 후예답게 숙련된 서화의 필묵법을 토대로 했으나, 20세기 후반의 미술 이론을 폭넓게 섭렵하며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했죠. 강한 역동성을 분출해 관객들에게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합니다.”

송 초빙교수의 멘트에서 그의 화가 데뷔전인 개인전이 얼마만큼 큰 반향을 얻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개인전 이후 그는 소위 잘 나가는 화가 반열에 올랐다. 화가로서 전시가 잘 됐기에 늘 제1회 개인전을 넘어서려 했다. 그의 트라우마는 국내 최고의 미술가문 중 하나인 ‘집안’이 아니라 첫 개인전이라는 점을 밝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그는 전남대 미술대학 교수로 안착하게 된다. 대학 교수로 안착한 덕분에 꾸준히 펼쳐온 작업 토양이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농 등 조상 덕이라는 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바깥 사람들이 그의 화가로의 삶 곳곳에 조상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본다는 점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고, 집안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바깥사람들의 생각과 조금 결을 달리 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롤모델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는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 선생(1913~ 2001)을 자신의 롤모델로 꼽았다.

“롤모델을 운보 김기창 선생으로 꼽으니까 사람들이 청각 장애로 묶는 경향이 있더군요. 그건 전혀 아닙니다. 저는 청각장애를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죠. 학창 시절 놀리는 애들도 있었지만 청각장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남농 할아버지가 1987년 별세하셨는데 목포 소재 남농기념관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조문을 온 운보 선생을 처음 뵈었죠. 그때가 스물 일곱으로 조금 더 말을 많이 붙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늘 아쉬움을 느껴왔죠.”

그가 운보의 작품을 보고 큰 감화를 받은 때는 고 1 때였다. 작품을 보고 미술에 더 확신을 하게 한 장본인을 10년 후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뵌 것이다. 그는 어쩌면 다른 화가들보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계 거봉들을 자연스럽게 대하며 성장을 한 듯하다. 흔히 화단에서 그를 말할 때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가(家)로 묶곤 한다. 그에게는 소치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 까닭이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소치 허련을 이어 미산 허형, 남농 허건 및 임인 허림, 임전 허문으로 이어지는 소치가의 5대째 화업을 계승하고 있다. 보통의 화가들은 자신의 집안 배경이 이렇다면 대개 스트레스를 받고 난리가 날 텐데, 그는 집안 배경에 신경쓰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대가들 자녀나 후손 중 잘되는 사람을 많이 못봤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애초 집안 배경을 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려는 성향이 강했던 이유로 해석됐다.

또 그는 서울대 입시 때 동양화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집안 배경이 된 동양화과에 가지 않고 회화학과를 진학, 서양화(수채화)로 진로를 정했다.

그는 여러모로 집안도, 환경도 모두 엘리트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집안이나 환경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 보였다. 자신의 소신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창작생활을 병행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펼쳐오는 동안 몇 차례의 작품 변화를 거쳐왔다.

‘유목동물 인간2006-8’(2006)
중견화가 허진 전남대 예술대학장은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손 재주만 가지고 미술에 임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치열하게 공부를 하면서 뜨거운 가슴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묵시’ 시리즈(1988∼1991)를 시작으로 ‘유전, 환. 부적’(1990∼1992), ‘다중인간’(多重人間, 1992∼1995)과 ‘현대인의 자화상’(1995∼1997), ‘익명인간’(1997∼1999)을 순차적으로 선보인데 이어 2000년대 이후부터 ‘익명인간’에서 ‘익명동물’로 바꿔 작업활동을 전개했다. ‘유목동물’(2005∼2009)로부터 ‘동대문운동장 가림막 프로젝트’(2008∼2009), ‘유목동물,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2010∼2012) 등의 작업들이 그것이다. 현재의 작업은 2006년부터 집중해온 ‘유목동물’ 시리즈가 지속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담론은 ‘노마드’(nomad)다. 현대인의 삶을 유목에 빗댄 표현으로 한곳에 정주하지 못한 채 떠돌며 살 수밖에 없는 현대적 삶에 대한 반어로 읽힌다.

예순이 넘은 나이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그림을 잘 알지 못하겠다’고 밝힌 그는 이처럼 많은 변화를 겪어왔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작품 변화보다는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아울러 작업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공자와 노자, 소크라테스, 농민의 일상을 대변한 바르비종파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월드컵 4강을 일군 감독 히딩크, 그리고 종교 등을 예로 들며 작업을 비유해 설명했다. 아마 도나 끈기 등 예술가의 자세에 대해 다시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는 폭넓은 사유를 통해 예술의 깊이를 더해간다. 모든 예술의 시간은 죽음의 공포라고 규정했다. 예술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면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시각이다. 아울러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손재주로만 작업을 하면 안되고, 철학과 문학 등 책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공부를 하는 동시에 인정을 갖춘 인격체가 작업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는 다소 완벽주의자라 할 수 있다. 성격상 완벽주의를 추구해서다. 그 완벽주의 성향은 그대로 작품에 투영된 듯하다. 그림이 꽉 채워진 느낌으로 인해 주변에서 답답하다는 반응으로 이어지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젊은 작가들과 관련해서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날 그림을 배척만 하지 말고 수시로 보면서 보는 눈을 키워가야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내비쳤다.

그는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던 밀레와 화도의 경지이자 길을 내포하고 있는 도의 중요성을 들려주면서 미술을 더욱 풍성하고 깊이있게 꾸려갈 수 있는 예술가들이 각자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을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향후 서울과 목포를 오가면서 대학과 창작을 병행, 생활을 해나갈 계획을 밝히며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손 재주만 가지고 미술에 임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치열하게 공부를 하면서 뜨거운 가슴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조건이 맞아야 영혼 가득한 그림이 나오는 것이겠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게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라고 할 수 있죠. 아무래도 손으로만 그린 그림보다는 밀레처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그림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큰 감동이 있듯이 저도 그렇게 그리고 싶어요.”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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