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이 모이면 바다가, 모래가 쌓이면 사막이 되죠"
김희만 대표 제안…하루 100원씩 모아 23년간 선행
초·중·고·대학생 1078명에 총 1억8110만원 장학금
소외 계층에 의료·난방비 지원 등 곳곳서 나눔 행사
초·중·고·대학생 1078명에 총 1억8110만원 장학금
소외 계층에 의료·난방비 지원 등 곳곳서 나눔 행사
입력 : 2021. 09. 16(목) 18:02

봉사활동 단체인 ‘100원회’의 광주 회원들과 김희만 대표(사진 오른쪽 3번째)가 지난 12일 광주 광산구에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중·고등·대학생들을 돕기 위해 57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들의 후원은 23년째 이어져 1078명의 광주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하루에 100원이면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신념을 23년간 이어오면서 꾸준히 소외이웃에 도움을 주고 청소년들이 미래에 대한 꿈을 잃지 않도록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온 이들이 있어 지역사회를 훈훈하게 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순수 봉사활동 단체인 ‘100원회’.
100원회는 이름 그대로 하루에 100원씩을 모으면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이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그 시작은 공직자였던 김희만 대표(72)였다.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힘들기만 하던 지난 1999년 4월.
당시 서구청 경제과장을 지내던 김 대표는 우연히 신문 기사 하나를 접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에게 먹이고자 소고기를 훔쳤던 홀어머니가 경찰에 구속됐다는 이야기였다.
이를 접한 김 대표는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힘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한참 고민하던 김 대표는 서랍 속에 100원짜리 동전이 돌아다니는 걸 봤고, 지금의 100원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됐다.
김 대표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혼자 모은 100원보다는 여럿이 모은 100원이면 충분히 소외 이웃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생활정보지에 ‘하루 100원으로 불우이웃을 도우실 분을 모집한다’고 실은 광고는 광주 지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타 지역까지 입소문을 타면서 어린 학생부터 80대 어르신까지 연령층을 가리지 않고 한두명씩 늘어나기 시작한 회원은 어느덧 700여명의 동참과 꾸준한 후원을 이끌어 냈다.
23년이란 세월이 훌쩍 흐르면서 구성 인원들은 조금씩 달라지고, 100원짜리 동전을 돼지 저금통에 한가득 모아 직접 찾아오는 풍경은 사라졌지만, ‘힘든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자’는 이들의 마음가짐은 마음가짐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회원들은 서로의 얼굴도 모르지만 하루에 100원씩 한달간 3000원을 모으거나, 자동 이체를 통해 적지 않은 금액을 후원하는 등 자유롭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만큼의 성금을 모아오고 있다.
이렇게 모인 100원의 기적은 작지 않았다.
후원금은 광주 5개 자치구의 추천을 받은 학생들에게 ‘꿈을 키울 수 있는 장학금’으로 전달돼 오고 있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지난 2019년에는 대학생 10명과 중·고등학생 18명에게 총 660만원의 장학금이 전달됐고, 지난해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고등·대학생 21명에게 비대면 방식인 계좌 입금을 통해 ‘코로나19 극복 특별 장학금’ 530만원을 전했다.
100원회의 후원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커진 올해도 이어졌다.
추석을 앞둔 지난 12일 100원회는 어김 없이 대학생 11명과 중·고등학생 12명에게 총 570만원의 장학금을 건넸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2학기 신학기를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마음이 모인 것이다.
이밖에도 100원회는 지난해 3월 코로나19 확산으로 대구 시민들이 고통을 받을 때도 고통분담 차원에서 마스크를 지원하는가 하면, 소외계층 의료비, 난방비 지원, 독거노인 영정사진 지원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곳에 온정을 전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모으다 보니 장학금을 전달 받은 학생들의 감회도 남다르다.
올해 장학금 대상자로 선정된 대학생 임하늘씨(21)는 “요즘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모든 국민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정성으로 장학금을 모아 주셔서 감사드린다”며 “장학금을 통해 반드시 꿈을 이뤄 항상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봉사하며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장학금을 받은 조정욱씨도 “코로나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도 하루에 100원씩 정성 들여 모아진 장학금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면서 “사회에 진출하면 반드시 어려운 이웃과 동행하는 자세를 지금부터 다지겠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100원회가 22번의 전달식을 통해 장학금을 받은 중·고등·대학생은 1078명으로, 100원의 관심이 모인 장학금은 1억8110만원이라는 태산을 쌓았다.
이렇게 쌓인 인연은 다시 100원회로 돌아오고,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어느덧 장성해 100원회에 후원을 해 받은 사랑을 지역사회에 다시 베풀고 있다.
김 대표는 서구 서창동장으로 근무했을 당시 공공근로를 하던 한 여성이 어려운 가정 형편에 처한 것을 알고 이 가정의 초등학교 4학년생을 지속 지원했다.
이 초등학생은 대학을 졸업, 현재 광주 한 대학 병원에 간호사로 취업해 최일선 현장에서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 간호사는 첫 취업의 월급 전체를 김 대표에게 후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100원회에서 10여년 전 지원을 받았던 한 유치원생은 현재 대학을 졸업하고 군 장교가 돼 국민을 지키면서 100원회를 후원하는 회원이 됐다.
기탁받은 장학금으로 학교를 졸업한 한 남학생은 자동차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꾸준한 후원 활동을 진행하고,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회원이었던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후원활동을 진행하는 손녀도 있다.
이처럼 지역사회에 돌고 도는 온정의 중심에는 김 대표의 역할이 크다.
그는 후원금이 부족할 때는 자신에게 지급된 정부의 1·2차 재난지원금을 모두 후원금으로 보태는가 하면, 헌신을 인정 받아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할 때 주어진 부상 700~800만원도 전액 장학금 지급에 사용했다.
또 공무생활을 마친 퇴직금으로 트럭을 구매한 그는 아침, 저녁으로 동네에서 폐지 등을 수거·판매해 항상 모자르기만 한 후원금을 충당해오기도 했다.
김 대표는 “차량이 오래돼 3~4년 전부터는 폐지 수거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올해도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금액을 후원하기 위해 장학생을 찾는 과정에서, 열댓 곳의 연락을 받았지만, 모두를 도와줄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또 “100원회는 따로 사무실을 운영하지도 않기 때문에 매년 장학금 전달식을 홍보하면서 이를 접한 시민들이 알음알음 연락해 오는 식으로 후원자를 구성하고 있다”면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의 입장을 고려해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이들의 꾸준함은 ‘물 한방울이 모여 바다가 되고 모래알 하나가 모여 사막이 된다’는 의식 공유에 있었다.
김 대표는 “회원들은 대부분 금액이 적어도 꾸준히만 하면 된다, 적은 금액이지만 나같은 사람이 여러명 모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기부를 중간에 그만두는 분도 많지 않다”며 “이건 남을 돕는 것 같지만 그 기쁨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초 100원회를 꾸렸을 때 주위에서 ‘100원짜리를 모아봤자 얼마나 남을 도울 수 있겠냐’, ‘그런 모임이 얼마나 가겠느냐’ 등의 말을 듣기도 했다”며 “하지만 모임은 중단되더라도 혼자서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을 가졌고, 그게 20년 넘게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나눔은 액수의 적고 많음에 있지 않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며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바로 순수 봉사활동 단체인 ‘100원회’.
100원회는 이름 그대로 하루에 100원씩을 모으면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이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그 시작은 공직자였던 김희만 대표(72)였다.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힘들기만 하던 지난 1999년 4월.
당시 서구청 경제과장을 지내던 김 대표는 우연히 신문 기사 하나를 접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에게 먹이고자 소고기를 훔쳤던 홀어머니가 경찰에 구속됐다는 이야기였다.
이를 접한 김 대표는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힘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한참 고민하던 김 대표는 서랍 속에 100원짜리 동전이 돌아다니는 걸 봤고, 지금의 100원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됐다.
김 대표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혼자 모은 100원보다는 여럿이 모은 100원이면 충분히 소외 이웃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생활정보지에 ‘하루 100원으로 불우이웃을 도우실 분을 모집한다’고 실은 광고는 광주 지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타 지역까지 입소문을 타면서 어린 학생부터 80대 어르신까지 연령층을 가리지 않고 한두명씩 늘어나기 시작한 회원은 어느덧 700여명의 동참과 꾸준한 후원을 이끌어 냈다.
23년이란 세월이 훌쩍 흐르면서 구성 인원들은 조금씩 달라지고, 100원짜리 동전을 돼지 저금통에 한가득 모아 직접 찾아오는 풍경은 사라졌지만, ‘힘든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자’는 이들의 마음가짐은 마음가짐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회원들은 서로의 얼굴도 모르지만 하루에 100원씩 한달간 3000원을 모으거나, 자동 이체를 통해 적지 않은 금액을 후원하는 등 자유롭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만큼의 성금을 모아오고 있다.
이렇게 모인 100원의 기적은 작지 않았다.
후원금은 광주 5개 자치구의 추천을 받은 학생들에게 ‘꿈을 키울 수 있는 장학금’으로 전달돼 오고 있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지난 2019년에는 대학생 10명과 중·고등학생 18명에게 총 660만원의 장학금이 전달됐고, 지난해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고등·대학생 21명에게 비대면 방식인 계좌 입금을 통해 ‘코로나19 극복 특별 장학금’ 530만원을 전했다.
100원회의 후원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커진 올해도 이어졌다.
추석을 앞둔 지난 12일 100원회는 어김 없이 대학생 11명과 중·고등학생 12명에게 총 570만원의 장학금을 건넸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2학기 신학기를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마음이 모인 것이다.
이밖에도 100원회는 지난해 3월 코로나19 확산으로 대구 시민들이 고통을 받을 때도 고통분담 차원에서 마스크를 지원하는가 하면, 소외계층 의료비, 난방비 지원, 독거노인 영정사진 지원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곳에 온정을 전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모으다 보니 장학금을 전달 받은 학생들의 감회도 남다르다.
올해 장학금 대상자로 선정된 대학생 임하늘씨(21)는 “요즘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모든 국민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정성으로 장학금을 모아 주셔서 감사드린다”며 “장학금을 통해 반드시 꿈을 이뤄 항상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봉사하며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장학금을 받은 조정욱씨도 “코로나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도 하루에 100원씩 정성 들여 모아진 장학금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면서 “사회에 진출하면 반드시 어려운 이웃과 동행하는 자세를 지금부터 다지겠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100원회가 22번의 전달식을 통해 장학금을 받은 중·고등·대학생은 1078명으로, 100원의 관심이 모인 장학금은 1억8110만원이라는 태산을 쌓았다.
이렇게 쌓인 인연은 다시 100원회로 돌아오고,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어느덧 장성해 100원회에 후원을 해 받은 사랑을 지역사회에 다시 베풀고 있다.
김 대표는 서구 서창동장으로 근무했을 당시 공공근로를 하던 한 여성이 어려운 가정 형편에 처한 것을 알고 이 가정의 초등학교 4학년생을 지속 지원했다.
이 초등학생은 대학을 졸업, 현재 광주 한 대학 병원에 간호사로 취업해 최일선 현장에서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 간호사는 첫 취업의 월급 전체를 김 대표에게 후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100원회에서 10여년 전 지원을 받았던 한 유치원생은 현재 대학을 졸업하고 군 장교가 돼 국민을 지키면서 100원회를 후원하는 회원이 됐다.
기탁받은 장학금으로 학교를 졸업한 한 남학생은 자동차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꾸준한 후원 활동을 진행하고,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회원이었던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후원활동을 진행하는 손녀도 있다.
이처럼 지역사회에 돌고 도는 온정의 중심에는 김 대표의 역할이 크다.
그는 후원금이 부족할 때는 자신에게 지급된 정부의 1·2차 재난지원금을 모두 후원금으로 보태는가 하면, 헌신을 인정 받아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할 때 주어진 부상 700~800만원도 전액 장학금 지급에 사용했다.
또 공무생활을 마친 퇴직금으로 트럭을 구매한 그는 아침, 저녁으로 동네에서 폐지 등을 수거·판매해 항상 모자르기만 한 후원금을 충당해오기도 했다.
김 대표는 “차량이 오래돼 3~4년 전부터는 폐지 수거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올해도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금액을 후원하기 위해 장학생을 찾는 과정에서, 열댓 곳의 연락을 받았지만, 모두를 도와줄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또 “100원회는 따로 사무실을 운영하지도 않기 때문에 매년 장학금 전달식을 홍보하면서 이를 접한 시민들이 알음알음 연락해 오는 식으로 후원자를 구성하고 있다”면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의 입장을 고려해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이들의 꾸준함은 ‘물 한방울이 모여 바다가 되고 모래알 하나가 모여 사막이 된다’는 의식 공유에 있었다.
김 대표는 “회원들은 대부분 금액이 적어도 꾸준히만 하면 된다, 적은 금액이지만 나같은 사람이 여러명 모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기부를 중간에 그만두는 분도 많지 않다”며 “이건 남을 돕는 것 같지만 그 기쁨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초 100원회를 꾸렸을 때 주위에서 ‘100원짜리를 모아봤자 얼마나 남을 도울 수 있겠냐’, ‘그런 모임이 얼마나 가겠느냐’ 등의 말을 듣기도 했다”며 “하지만 모임은 중단되더라도 혼자서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을 가졌고, 그게 20년 넘게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나눔은 액수의 적고 많음에 있지 않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며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 뿐”이라고 덧붙였다.
최성국 기자 stare8194@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