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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섬을 가다]국내 최초 수중성이자 천연요새 ‘장군도’
<11>역사를 품은 섬-장군도
이순신 전라좌수사로 여수 부임해 시설보강 진행
쇠사슬 연결해 선박 진출입 통제…왜구 침략 방비
임진왜란 연전연승 기반…전라도 수군 막강 뒷심

2019. 06.24. 18:36:39

1653년 표류돼 조선에 붙잡힌 하멜 일행은 1666년 여수에서 탈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를 기념해 여수시는 2005년 하멜등대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여수의 명물 여수앞바다 포장마차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젊음의 열기가 가득하다.
여수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이는 장군도(돌산대교)까지가 이순신의 불침항모이자 심장 역할을 수행한 바다이다.
여수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이는 장군도(돌산대교)까지가 이순신의 불침항모이자 심장 역할을 수행한 바다이다.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진남관은 지금 한창 보수공사중이고(동상뒤 망해루건물 뒷쪽) 장군도가 지키고 있는 여수 앞바다는 이 나라를 지키는 보루였다.
여수 진남관 망해루에 오르면 여수 앞바다에 둥근 섬 하나가 보인다. 지금 돌산대교 바로 앞에 있는 섬이다. 소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그 내면을 살피면 인공으로 만든 섬이자 방어시설인 장군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성(水中城)이고 천연요새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이 성은 호남을 지키는,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의 역할을 했고, 또한 각 지역으로 출동하는 수군함선들의 본항이자 기항지로, 절대 무너지지 않는 군사기지로서의 강력한 방어시설을 보유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사령본부 역할을 충실히 해내 수많은 병력을 동원한 왜구들도 결코 함락시킬 수 없었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하자마자 장군도에 대한 시설보강에 들어갔다.

임진년 2월 2일 ‘난중일기’에 여수 앞바다에 쇠사슬을 연결할 수 있는 큰돌 80여 개를 실어왔다는 기록이나 쇠사슬을 엮는데 쓸 나무를 베어왔다는 2월 9일의 기록 등은 바로 여수좌수영 앞바다를 지키려는 이순신의 방어책으로서 장군도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장군도와 지금 하멜등대가 서 있는 자리를 쇠사슬로 연결, 왜구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히 방비했던 것이고 이런 방어책략의 중심에는 지금의 장군도가 있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중성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공섬이다. 이 인공섬이자 수중성이 있음으로 왜구들은 배를 타고 여수 앞바다로 진출할 수 없었고 전라좌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이자 통제영으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군도는 방왜축제성이라고도 했다.

이 장군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531년 발행된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다. 1498년 왜구들이 여기 장군도의 해로를 통해 여수에 상륙, 고흥 녹동까지 휩쓸어버린 녹도왜변 당시 이량(李良) 장군이 처음으로 건설해 왜구들이 다시는 여수항으로 상륙하지 못하도록 전진수군방어 시설로 축조했다고 한다. 이 전진방어시설을 축조하자 왜구들이 다시는 범접하지 못했고 주민들이 이량 장군을 기려 장군도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물이 빠지면 약 5m 정도가 드러나는 일종의 여(礖)였으나 석재를 배로 실어다 축성한 결과 높이는 7m 정도로 높이고 폭은 100여m에 이르는 커다란 인공섬이자 수중성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에다가 쇠사슬을 연결해 선박의 진·출입을 통제하고 왜구들의 침략을 차단하고자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왔을 때부터 장군도의 복원을 통해 왜구의 침략에 여수를 방비하고자 대비한 것이다.

전라좌수사로 처음 부임한 이순신은 부임 초기부터 이러한 지형적 잇점을 십분 발휘,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고 막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진해루가 있는 여수 앞바다를 지키고 이곳을 중심으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중심기지로, 절대 격침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군도가 가진 지형적 잇점을 철저하게 이용해 적은 병력과 병선으로도 왜구들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수가 가진, 여수가 가질 수 있었던 약무호남시무국가의 출발이었다. 이순신이 지킨 여수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패할 때까지 왜구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여수에서 출발한 이순신의 군대는 연전연승 무적무패였다. 옥포해전, 합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해전, 안골포해전, 웅포해전, 당항포해전, 장림포해전, 부산포해전, 장문포해전 등등의 전투의 출발지는 바로 여수였다. 군사를 재정비하고 함선을 점검하며 안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불붙은 함선에서 모든 병사가 전사하였는데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압송되고 백의종군하기 전까지는 여수는 굳건하게 왜구로부터 한반도를 지키는 보루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순신이 하옥되고 통제권을 넘겨받은 원균은 경상수사 배설이 가지고 도망간 12척의 배만 제외하고 이순신이 가지고 있었던 전라좌수영의 배를 전부 잃어버린다.

장흥 회령포에서 12척의 좌수영 전선과 1000여 명의 수군을 가지고 싸움에 임해야만 했다. 이 때부터 이순신은 몹시 아팠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여수를 떠나 해남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왜구는 이 때다 싶어 이순신을 제거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을 지키는 전라도 수군들은 막강했다. 전라좌수영에서 이순신과 생사를 같이 하던 노련한 뱃꾼들이 이순신과 함께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병력만으로 명량대첩을 치룬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 뱃길과 물길을 아는 전라도 수군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중심에 믿고 따르던 이순신이 있었다.

그 이순신이 산전수전 모든 사정을 겪고서 전라도에 대해서 한 말이 바로 약무호남시무국가이다. 누구도 알 수 없고 겪어보지 못했던 처참했던 당시의 세계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물길과 뱃길을 잘 아는 전라도 사람들의 노하우였던 것이다.

이순신의 23전23승이라는 신화의 바탕에는 바로 전라도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바닥에 깔려 있다. ‘전라도의 섬을 가다’는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 역사를 왜곡한다는 항의가 있었다. 전라도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휘관에 전라도 사람들이 없었고 전부가 경상도 사람들이 지휘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싸웠지 전라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전라도에는 양반 무관이 많이 있을 리 없었다. 정철이 정여립 모반사건을 조작해 진영논리에 반대되는 전라도의 사대부들을 대부분 제거해버리고 배제했기에 문관이나 무관의 양반층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드물었을 뿐이다.

물길과 뱃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노련하게 판옥선 같은 배를 운항하고 기동한다는 말인가? 특히나 그것도 천연요새 수중성 여수 장군도에서 발진한 병선들이 경상도에서 싸우고 또한 후퇴하여 전라도에서 싸웠고, 명량해전에서 싸웠고, 목포 보화도에서 다시 힘을 얻고, 완도 고금도에서 명나라 수군과 연합해 다시 재기하여 왜구들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은 바로 이러한 민초들의 힘 때문에 승리한 것이지 단순히 조선왕조가 건재했다는 사대주의적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논리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전라도의 이름 없는 민초들, 격군과 노군들, 수군과 배무이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왜구들의 보급로가 차단되고 병참지원이 불가능하게 돼 전쟁지속능력이 없어지자 왜구가 물러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임진왜란을 승리라고 하는 것이지 조선왕조를 존속하게 해서 승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전라도 민초들의 싸움은 재평가되어야 하고 ‘약무호남시무국가’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로 다시 재정립돼야 한다.

그래서 여수 앞바다 장군도가 달리 보이는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려는 장군도를 이제라도 다시 평가해야 한다. 우리를 지킨 인공섬,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성으로서 장군도가 가져다 준 결과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광남일보 @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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