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대하는 공손한 태도
계간 '시와사람' 발행인·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입력 : 2025. 10. 30(목)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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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와사람’ 발행인·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문화산책]모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향한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대부분 삶의 본질에 천착하고 있다. 전쟁의 잔혹함과 국가 폭력, 인권을 포함하여 역사의 비극성과 그 이면에 깃든 그늘을 형상화하였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결과적으로 반성과 성찰의 메시지를 받아 인문주의적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그러나 지상에서 유토피아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을 통해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에 이르고자 한다.
필자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문주의적인 세계를 만날 때 전율을 느낀다. 도저한 문학의 힘을 느낌으로써 문학의 가치와 효용성을 확인한다. 흔히 문학은 경제적 부가가치를 쉽게 창출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현실에서 외면되고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득하고 먼, 그리고 외로운 문학의 길을 가는 문학인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모든 예술인을 응원한다.
그러나 예술인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술인을 흉내 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욕망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이 예술가라고 착각하여 허명에 눈먼 사이비인 경우가 있다. 특히 필자가 만난 여러 시인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보아왔다. 참으로 가슴이 쓰리고 안타까워 훌륭한 독자로 남기를 권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이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시인을 동경하여 시인이 되겠다는 순수한 생각이, 시를 왜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보기에 좋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에 멈춰버린 채 시를 이해한다면 시의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한 몽상가가 되고 말 것이다.
시 쓰기는 간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삶을 경험미학적 차원에서 재구성하여 “왜 시를 쓰는가?”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시가 실존 탐구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시가 던지는 보편적인 가치는 삶의 방식에 천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음풍농월에 가까운,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시가 아니라 그저 가벼운 감정을 배설하는 시를 쓰는 시인을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문예 창작을 가르치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를 배우고 있다. 특히 대학에 개설된 문예창작과는 전문 교수들이 창작의 이론과 실기를 가르쳐 많은 작가를 배출하여 한국 문학의 질을 향상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여러 기관에서도 시를 가르치는 곳이 생겨나 문학에 목마른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다. 그리고 현역 시인들이 개인적으로 문하생을 양성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런데 시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물론 시를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 문제가 노출되고 있어 염려된다. 가르치는 시인의 자격도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시를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지 않아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하다. 앞에서 밝혔듯이 노벨 문학상을 비롯한 권위 있는 문학상들은 문학이 인류에게 기여하는 메시지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통찰에 이르게 하여 문학의 효용성과 가치를 보여준다.
필자는 30년 동안 시 전문지를 펴내면서 신인상 응모자들을 발견하면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가능성을 가진 응모자들에게서 희열을 느끼며 반가움에 가슴이 떨렸다. 가능성이란 시를 대하는 공손함에서 온다. 간절한 언어, 진정성 있는 언어, 아직 미흡하다 해도 틀림없이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신인의 언어는 공손하다. 이 공손함이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온갖 수사를 통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욕심 가득한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에서, 그럴듯하고 멋질 것 같은 시어들, 횡설수설한 행간 속에 결국 허접한 세속적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서 시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는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시는 시인 자체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것은 모든 예술에도 적용된다.
필자는 시를 함부로 대하는 시인과 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에게 시는 무엇인가?”, “시가 당신의 세속적 욕망을 채워주는 액세서리인가?”, “당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감각기관인가?”
필자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문주의적인 세계를 만날 때 전율을 느낀다. 도저한 문학의 힘을 느낌으로써 문학의 가치와 효용성을 확인한다. 흔히 문학은 경제적 부가가치를 쉽게 창출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현실에서 외면되고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득하고 먼, 그리고 외로운 문학의 길을 가는 문학인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모든 예술인을 응원한다.
그러나 예술인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술인을 흉내 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욕망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이 예술가라고 착각하여 허명에 눈먼 사이비인 경우가 있다. 특히 필자가 만난 여러 시인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보아왔다. 참으로 가슴이 쓰리고 안타까워 훌륭한 독자로 남기를 권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이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시인을 동경하여 시인이 되겠다는 순수한 생각이, 시를 왜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보기에 좋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에 멈춰버린 채 시를 이해한다면 시의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한 몽상가가 되고 말 것이다.
시 쓰기는 간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삶을 경험미학적 차원에서 재구성하여 “왜 시를 쓰는가?”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시가 실존 탐구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시가 던지는 보편적인 가치는 삶의 방식에 천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음풍농월에 가까운,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시가 아니라 그저 가벼운 감정을 배설하는 시를 쓰는 시인을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문예 창작을 가르치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를 배우고 있다. 특히 대학에 개설된 문예창작과는 전문 교수들이 창작의 이론과 실기를 가르쳐 많은 작가를 배출하여 한국 문학의 질을 향상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여러 기관에서도 시를 가르치는 곳이 생겨나 문학에 목마른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다. 그리고 현역 시인들이 개인적으로 문하생을 양성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런데 시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물론 시를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 문제가 노출되고 있어 염려된다. 가르치는 시인의 자격도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시를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지 않아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하다. 앞에서 밝혔듯이 노벨 문학상을 비롯한 권위 있는 문학상들은 문학이 인류에게 기여하는 메시지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통찰에 이르게 하여 문학의 효용성과 가치를 보여준다.
필자는 30년 동안 시 전문지를 펴내면서 신인상 응모자들을 발견하면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가능성을 가진 응모자들에게서 희열을 느끼며 반가움에 가슴이 떨렸다. 가능성이란 시를 대하는 공손함에서 온다. 간절한 언어, 진정성 있는 언어, 아직 미흡하다 해도 틀림없이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신인의 언어는 공손하다. 이 공손함이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온갖 수사를 통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욕심 가득한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에서, 그럴듯하고 멋질 것 같은 시어들, 횡설수설한 행간 속에 결국 허접한 세속적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서 시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는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시는 시인 자체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것은 모든 예술에도 적용된다.
필자는 시를 함부로 대하는 시인과 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에게 시는 무엇인가?”, “시가 당신의 세속적 욕망을 채워주는 액세서리인가?”, “당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감각기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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