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을 통한 건강한 어린이 나라 건설
강경호 시와사람 대표
입력 : 2024. 09. 19(목) 17:25

강경호 시와사람 대표
[문화산책] 10월 13일 장흥군민회관에서 ‘장흥문학포럼’의 대상자인 아동문학가 녹촌 김준경(1927~2012) 선생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녹촌 선생은 우리나라 아동문학사에서 리얼리즘 세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한국민족문학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아동문학분과 고문으로 활동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어린이들이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에서 이를 극복하여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하고자 작품을 통해 형상화시켰다. 그런데도 현재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녹촌은 태생적으로 건강한 어린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환경인 1927년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의 유가적 가풍을 지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선친은 집안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쳤다. 전통과 선비정신으로 충만한 가풍을 고스란히 전수받았다. 선친은 독립자금책으로 항일의식과 조국애가 투철하였다. 그의 할머니는 하찮은 생명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생명성을 어린 녹촌에게 가르쳤다.
2007년 가을, 학교에서 정년퇴임한 후 서울로 올라와 살던 집에 필자가 찾아갔을 때, 마치 옛 선비처럼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의 옥상에 숲을 만들어 가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도시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기 위해 포도, 옥수수, 무, 배추 등 각종 농산물을 자라게 해 새들이 날아오게 하였다. 어린 시절 학교 갔다 오다가 생키를 꺾어 온 그를 할머니가 소나무의 우듬지를 꺾어버리자 소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고 꾸짖은 것을 교훈 삼아 평생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전남일보 기자를 하던 한국전쟁 중, 이념에 의해 평생 경상도에서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가진 선생은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연’이 당선된 후 우리나라 아동문학계의 거목이 되었다. 40여 년이 넘는 교직생활을 하면서 우리 글을 모르면 전통과 민족정신을 알 수 없다며 근무하는 학교에서 독서와 글짓기 운동을 실시하였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시를 짓게 하여 해마다 문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이 나이에 맞는 정서를 깃들게 하려고 100여 편이 넘는 동요를 만들어 노래 부르게 하였다. 뿐만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가 자연을 관찰하게 하고, 틈만 나면 전지가위를 들고 교정에 나가 능숙하게 나무를 다듬었다. 인간을 다듬는 정신이 꼿꼿하게 억센 것처럼, 풀을 뽑고 퇴비를 마련하느라 잡초를 뽑았다.
이렇듯 실천적인 삶은 조부로부터의 엄격함, 아버지로부터의 조국애, 할머니로부터의 자애로움, 사범학교 때 조희관 선생으로부터 민족애와 우리말의 아름다움, 그리고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자신을 문단에 진출하게 한 마음의 스승 이원수 선생으로부터는 리얼리즘 문학, 함께했던 아동문학가 한흑구 선생으로부터는 도산정신(島山情神)을 배웠다. 특히 한국전쟁 때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무서운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나라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의 잘못된 정신상태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러한 고민이 어린이들의 글쓰기 교육과 자신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오염된 신인 제도와 상업화된 문학상 거래 등,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기존의 한국아동문학이 싫어 문단을 나와 문학 외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모아 어린이를 위한 참되고 순수한 아동문학을 해보자는 취지로 이오덕 선생과 함께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를 창립하였다.
작품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어중이떠중이 몰려다니며 어리석은 짓들만 저지르는 문단현실에 환멸을 느낄수록 선생은 자기 연마에 몰두하였다. 책상 위에서 작품만 쓰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자연 속으로 파고들어가 어린이들과 같이 울고, 같이 고민했다. 작가는 작품으로써 진리 탐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더불어 작가는 품위와 지조와 양심과 순수성을 지켜야 하고, 민족의 장래도 걱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녹촌 선생의 동시는 상업주의 문명의 세찬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갈팡질팡하는 어린이들의 생활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투지를 심어줄 수 있는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친다.
더불어 우리의 역사 속에 깃든 민족혼을 채굴하여 전통과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삶에 깃든 정신을 잇도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동시 한켠에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따스한 마음이 배어 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아끼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이른바 생태학적 상상력의 세계를 형상화하였다.
그의 동시는, 흙을 사랑하는 것이 고향을 지키는 것이며, 전통을 살리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작품세계이다. 그러할 때 정직한 사람이 될 것이며, 베푸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배어 있다.
선생이 가신 지 12년이 지났다.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져 녹촌 선생이 바라는 어린이들을 위한 건강한 환경은 왜곡되고 있다. 이제 조석으로 귀뚜라미가 울고 그 무더웠던 여름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오늘이야말로 선생의 삶과 문학 세계를 다시 음미할 때이다.
녹촌은 태생적으로 건강한 어린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환경인 1927년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의 유가적 가풍을 지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선친은 집안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쳤다. 전통과 선비정신으로 충만한 가풍을 고스란히 전수받았다. 선친은 독립자금책으로 항일의식과 조국애가 투철하였다. 그의 할머니는 하찮은 생명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생명성을 어린 녹촌에게 가르쳤다.
2007년 가을, 학교에서 정년퇴임한 후 서울로 올라와 살던 집에 필자가 찾아갔을 때, 마치 옛 선비처럼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의 옥상에 숲을 만들어 가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도시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기 위해 포도, 옥수수, 무, 배추 등 각종 농산물을 자라게 해 새들이 날아오게 하였다. 어린 시절 학교 갔다 오다가 생키를 꺾어 온 그를 할머니가 소나무의 우듬지를 꺾어버리자 소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고 꾸짖은 것을 교훈 삼아 평생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전남일보 기자를 하던 한국전쟁 중, 이념에 의해 평생 경상도에서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가진 선생은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연’이 당선된 후 우리나라 아동문학계의 거목이 되었다. 40여 년이 넘는 교직생활을 하면서 우리 글을 모르면 전통과 민족정신을 알 수 없다며 근무하는 학교에서 독서와 글짓기 운동을 실시하였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시를 짓게 하여 해마다 문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이 나이에 맞는 정서를 깃들게 하려고 100여 편이 넘는 동요를 만들어 노래 부르게 하였다. 뿐만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가 자연을 관찰하게 하고, 틈만 나면 전지가위를 들고 교정에 나가 능숙하게 나무를 다듬었다. 인간을 다듬는 정신이 꼿꼿하게 억센 것처럼, 풀을 뽑고 퇴비를 마련하느라 잡초를 뽑았다.
이렇듯 실천적인 삶은 조부로부터의 엄격함, 아버지로부터의 조국애, 할머니로부터의 자애로움, 사범학교 때 조희관 선생으로부터 민족애와 우리말의 아름다움, 그리고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자신을 문단에 진출하게 한 마음의 스승 이원수 선생으로부터는 리얼리즘 문학, 함께했던 아동문학가 한흑구 선생으로부터는 도산정신(島山情神)을 배웠다. 특히 한국전쟁 때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무서운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나라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의 잘못된 정신상태를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러한 고민이 어린이들의 글쓰기 교육과 자신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오염된 신인 제도와 상업화된 문학상 거래 등,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기존의 한국아동문학이 싫어 문단을 나와 문학 외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모아 어린이를 위한 참되고 순수한 아동문학을 해보자는 취지로 이오덕 선생과 함께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를 창립하였다.
작품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어중이떠중이 몰려다니며 어리석은 짓들만 저지르는 문단현실에 환멸을 느낄수록 선생은 자기 연마에 몰두하였다. 책상 위에서 작품만 쓰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자연 속으로 파고들어가 어린이들과 같이 울고, 같이 고민했다. 작가는 작품으로써 진리 탐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더불어 작가는 품위와 지조와 양심과 순수성을 지켜야 하고, 민족의 장래도 걱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녹촌 선생의 동시는 상업주의 문명의 세찬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갈팡질팡하는 어린이들의 생활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투지를 심어줄 수 있는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친다.
더불어 우리의 역사 속에 깃든 민족혼을 채굴하여 전통과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삶에 깃든 정신을 잇도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동시 한켠에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따스한 마음이 배어 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아끼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이른바 생태학적 상상력의 세계를 형상화하였다.
그의 동시는, 흙을 사랑하는 것이 고향을 지키는 것이며, 전통을 살리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작품세계이다. 그러할 때 정직한 사람이 될 것이며, 베푸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배어 있다.
선생이 가신 지 12년이 지났다.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져 녹촌 선생이 바라는 어린이들을 위한 건강한 환경은 왜곡되고 있다. 이제 조석으로 귀뚜라미가 울고 그 무더웠던 여름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오늘이야말로 선생의 삶과 문학 세계를 다시 음미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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