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좌절과 시련…내면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도예술인]첼리스트 이후성
광주시향 12년차 부수석단원 매년 독주회·제자 연주회 선봬
학창시절 태권도 선수 발탁…늦은 진로 변경에 힘든 시기도
독일 유학 연주자 꿈 키워 "감동 연주 위해 많은 노력" 밝혀
입력 : 2023. 11. 09(목) 17:17
이후성 첼리스트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며 “이전보다 연주를 즐길 수 있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느 쪽을 고르던 간에 지금 현실에 따라 ‘다른 선택이 나았을까’ 하는 후회는 남기 마련이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다.

이후성 첼리스트(광주시향 부수석단원)는 한때 태권도 선수를 꿈꿨다고 고백했다. 학창시절 우수한 실력으로 태권도 선수로 발탁되기까지 했던 그였다. 그러나 부상과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고, 음악을 전공으로 시작하기엔 다소 늦은 중학교 3학년이 돼서야 처음 첼로 활을 잡았다.

“교직에 근무하신 아버지는 제가 음악 교사를 하길 원하셨습니다. 부모님과 상의 끝에 예고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죠. 첼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한번 잡아본 것 빼고는 연주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 때의 기억이 좋아 첼로를 배워보겠다고 나선 거죠.”

운동선수를 꿈꾸며 체고 진학을 생각해왔던 그에게 물론 진로 변경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급하게 1년을 준비해 예고 입학시험을 봤지만 낙방했다.

일반고교에 진학한 후 연주 연습에 매진했다. 방황의 시간도 있었다. 갑작스레 바꾼 진로가 혼란스러웠고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하는 현실이 벅차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겨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첼로를 품에 안았다. 그때부터 ‘이게 내 길이구나’ 마음먹었고 더욱 열심히 연습에 몰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조선대 음악교육과에 입학했지만 교생 실습을 경험하며 부모님이 바라는 교사라는 직업은 자신과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달았다. 각종 콩쿠르 등 대회를 나갔지만 좌절이 많았다. 늦게 시작한 만큼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많았다. 하지만 벽에 부딪힐수록 연주자로서 욕심이 더 생겼다. 넓은 곳으로 유학을 떠나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배우고 싶었다.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기 위해 오기로 이겨내면서 버텨야 했죠. 그렇지만 연주자로서 계속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로 꿈을 접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는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을 설득시키고 대학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그렇듯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환율이 두 배 가까이 오른 때라 물가가 무척 비쌌다. 그러한 환경은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고 연습에만 매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 만점으로 디플롬을 취득하고, 뒤셀도르프 국립 음대에 입학했다. 시간이 흘러 최고 연주자 수료 과정을 1년 남기고 광주시향 단원 오디션에 합격했다. 독일과 국내를 오가며 졸업연주회를 무사히 마치고 2012년 학위를 따낼 수 있었다.

“유학길에 오를 때 부모님이 진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면 길이 있을 거라는 어떤 믿음이 있었어요. 나중에 광주시향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됐죠.”

6년여의 유학생활을 보내고 귀국한 그는 광주시향에 입단, 국내외 다양한 무대에서 솔리스트이자 실내악 연주자 등으로 활약했다. 체코 국립 교향악단, 도쿄 프라임 오케스트라, 헤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을 펼쳤다.

가장 연주에 자신있는 곡은 브람스의 ‘첼로소나타 2번 2악장’이다. 첼로의 모든 게 다 담겨있는 곡이라 느껴져서다. 열정과 슬픔, 아름다움.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아한다. 지금껏 독주회에서 두 번 선보였다.

커다란 무대와 수많은 관객이 있는 화려한 무대를 뒤로하고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귀국 독주회다. 아프셨던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연주하는 스스로 눈시울이 붉어져 참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제자 연주회
연주자로서 긴 시간 꾸준히 쌓아온 성실함과 끈기가 그에게 재능보다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됐다. 2012년 귀국 독주회를 시작으로 매년 독주회를 펼쳐왔으며 제자들과 함께하는 ‘제자 연주회’ 역시 꾸준히 해오고 있다. 전남대와 조선대, 여수 영재교육원에 출강하며 후학양성에도 힘써왔다.

“꾸준히 무대를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은 자기 관리 차원이자 음악이 좋아서입니다. 연주자로서 나이가 들면서 열정이 식어가고 실력이 퇴화하는 게 싫더군요. 연주할 때 중요한 것은 준비하는 과정이에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연주를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광주시향에 몸담은 지 12년째. 수많은 제자들과 후배들을 이끄는 어엿한 중견 연주자가 됐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는 그는 여전히 실력에 만족할 순 없지만 이전보다 더 연주를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연주를 틀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고민에 사로잡혔던 과거와 달리 자신의 음악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지금, 오래 전 선택이 옳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악보를 보는 것부터 기본 지식이 하나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지금 첼로와 음악은 제 인생의 전부가 됐습니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게 있죠. 무엇이든 오래 참고 견디는 사람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겁니다.”
김다경 기자 alsqlsdl94@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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