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그것과 우리
박병훈 톡톡브레인심리발달연구소 대표
입력 : 2023. 09. 13(수) 18:32

박병훈 톡톡브레인심리발달연구소 대표
[아침세평] 우리 사회는 터질 듯 말 듯한 수천만 개의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자신의 분풀이 수단으로 걸핏하면 찌르고 죽인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무섭다. 불안은 스스로를 옥죈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현상이 사회병리 현상으로 고착화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불안의 원뜻은 목을 조른다는 의미이다. 불안하면 무리수를 두게 된다. 사람이 정책을 펼치려면 표현하고 싶은 어떤 행위를 충분히 숙고해 그 결과를 따져본 후 실행해야 부작용이 최소화된다.
그런데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사고 기능이 마비되고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합리한 선택을 한다. 불합리한 선택의 당사자가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그 문제는 심각해진다. 상대와 약자를 힘으로 누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전가된다.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집안에서 부모가 싸우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직격탄이 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때 불안한 자녀들은 안전할 대상이나 방법을 찾게 된다. 심리적 상처가 누적되면 트라우마로 남는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는 말이다.
그 상처는 공격성, 불신, 중독현상, 지나친 자기애 등으로 표출된다. 한 집안에서도 그런데 국가적 수준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정치 지도자들이 이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사람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치기를 하며 분열을 조장한다.
분열된 당사자들은 길고 넓은 심리적 단층선을 만들어 서로 하이브리드 전쟁을 한다. 상호 존중이 없고 제도의 사용이 절제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상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관계성을 암시하고 있다.
얼마 전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한 수강생에게 자신을 소개해보라고 부탁했다. 그 수강생은 나이가 지긋한 학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며 우리 아내라고 했다.
중년 남성들이 자신의 아내를 소개할 때 대체로 우리 아내라고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소개한 우리 아내는 여러 사람의 남편을 두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수강생의 아내이자 자기 자녀들의 엄마이고 한 집안의 며느리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이때 그의 아내는 다중의 역할 속에서 균형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내에게 내 아내의 역할만 요구한다면 가족구성원 간의 평화와 관계성을 해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관계에서는 상대를 타자화시키게 된다. 타자화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게 되면 나와 다른 존재로서 상대를 분리된 객체로 부각 시킨다. 상대를 인격이 없는 물건이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화가 통할 리 없다. 아니 대화를 건넬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타자화된 대상은 우리에게서 이미 소외되고 배제되면서 차별을 당한다. 타자화를 시키는 주체들은 자기들 사이에 통용되는 규준을 바탕으로 이에 벗어난 타자를 단죄한다. 억압하고 배제하는 실제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토니 모리슨은 지구 상의 거의 모든 집단이 비슷한 방식으로 타자화를 통해 다른 집단을 통렬하게 비난해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서구 문화에서는 타자를 악마화해 왔다.
이 메커니즘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제는 타자화의 과정과 결과이다. 타자화를 시키는 방식은 강의나 교육에 의한 학습보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결혼이주 여성들을 상담할 때 이런 결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는 무지의 선량함이다.
바우만은 ‘이웃해 지낼 수는 있지만 내면적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 존재가 타자’라고 했다. 우리는 자신도 언젠가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각해야 한다. 상대를 ‘그것’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회복시켜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게 해야 한다.
나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현상이 사회병리 현상으로 고착화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불안의 원뜻은 목을 조른다는 의미이다. 불안하면 무리수를 두게 된다. 사람이 정책을 펼치려면 표현하고 싶은 어떤 행위를 충분히 숙고해 그 결과를 따져본 후 실행해야 부작용이 최소화된다.
그런데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사고 기능이 마비되고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합리한 선택을 한다. 불합리한 선택의 당사자가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그 문제는 심각해진다. 상대와 약자를 힘으로 누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전가된다.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집안에서 부모가 싸우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직격탄이 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때 불안한 자녀들은 안전할 대상이나 방법을 찾게 된다. 심리적 상처가 누적되면 트라우마로 남는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는 말이다.
그 상처는 공격성, 불신, 중독현상, 지나친 자기애 등으로 표출된다. 한 집안에서도 그런데 국가적 수준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정치 지도자들이 이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사람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치기를 하며 분열을 조장한다.
분열된 당사자들은 길고 넓은 심리적 단층선을 만들어 서로 하이브리드 전쟁을 한다. 상호 존중이 없고 제도의 사용이 절제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상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관계성을 암시하고 있다.
얼마 전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한 수강생에게 자신을 소개해보라고 부탁했다. 그 수강생은 나이가 지긋한 학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며 우리 아내라고 했다.
중년 남성들이 자신의 아내를 소개할 때 대체로 우리 아내라고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소개한 우리 아내는 여러 사람의 남편을 두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수강생의 아내이자 자기 자녀들의 엄마이고 한 집안의 며느리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이때 그의 아내는 다중의 역할 속에서 균형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내에게 내 아내의 역할만 요구한다면 가족구성원 간의 평화와 관계성을 해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관계에서는 상대를 타자화시키게 된다. 타자화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게 되면 나와 다른 존재로서 상대를 분리된 객체로 부각 시킨다. 상대를 인격이 없는 물건이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화가 통할 리 없다. 아니 대화를 건넬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타자화된 대상은 우리에게서 이미 소외되고 배제되면서 차별을 당한다. 타자화를 시키는 주체들은 자기들 사이에 통용되는 규준을 바탕으로 이에 벗어난 타자를 단죄한다. 억압하고 배제하는 실제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토니 모리슨은 지구 상의 거의 모든 집단이 비슷한 방식으로 타자화를 통해 다른 집단을 통렬하게 비난해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서구 문화에서는 타자를 악마화해 왔다.
이 메커니즘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제는 타자화의 과정과 결과이다. 타자화를 시키는 방식은 강의나 교육에 의한 학습보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결혼이주 여성들을 상담할 때 이런 결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는 무지의 선량함이다.
바우만은 ‘이웃해 지낼 수는 있지만 내면적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 존재가 타자’라고 했다. 우리는 자신도 언젠가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각해야 한다. 상대를 ‘그것’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회복시켜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게 해야 한다.
나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광남일보@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