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와 나르시시즘
최총명 상담학 박사(허그맘허그인심리상담센터 광주무등점 원장)
입력 : 2023. 09. 11(월) 18:33

[광남시론] 1980년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좌중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80년대의 정치는 한국의 상황이 엄혹하기도 하였고, 경제 발전에 희생된 민주화와 함께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주진영과 보수진영의 날선 대립이 있었으며, 그것을 이끄는 ‘카리스마 있는’ 김대중, 김영삼 등의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내 정치를 보면 ‘옛날 정치’ 혹은 ‘옛날 정치인들’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고, 그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막스 베버(1864-1920)는 그의 저서 ‘Charisma and Disenchantment: the vocation lectures’에서 지배방식으로써 카리스마를 언급하였을 만큼 정치에서 카리스마는 정치인의 역량으로서 아주 중요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베버가 언급한 카리스마적 지배는 구체적이고 형상화 된 이즘적인 방법이 아닌 대중·국민들이 한 정치가의 방식에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끼고 그를 따르며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즉, Top-down 방식이 아닌 Bottom-up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카리스마의 어원을 살펴보면 정치인에게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더 분명해진다. 카리스마는 어원이 그리스어로 아프로디테의 3명의 동반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풍요, 아름다움, 기쁨이 바로 동반자이며, 이것을 통칭하는 것이 그리스어이자 카리스마의 어원인 Khris다. 그럼 카리스마를 느끼며, 그 작동 방법인 Bottom-up이 정치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정치인을 보며 ‘풍요, 아름다움, 기쁨’을 느끼는 것이 그 시작이 아닐까 한다.
카리스마를 논하다 보면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카리스마와 어쩌면 한끝차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막스 베버도 카리스마가 넘치며 자연스럽게 추대된 정치지도자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의 조국에서 맞이한 ‘불행한’ 리더는 바로 히틀러였다(한나 아렌트(1906~1975)에 의하면 히틀러는 정신질환자는 아니었고 사리분별이 분명하였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에 앞서 히틀러를 언급하는 것은 히틀러가 ‘그 한끝차이’의 다름을 가진 나르시시스트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굉장히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느끼고, 자신이 무언가 하지 않아도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역시 자신의 특별하고 고귀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대인관계에서도 착취적이며, 공감능력이 현격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나르시시스트는 ‘나는 굉장히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숭배하거나 따를 수 밖에 없고,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무슨 행동, 말을 하더라도 괜찮고, 용서받을 수 있으며, 너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너희들과 달라서 특별하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끔찍하게도 정신병리적으로 반사회성 성격장애, 최근에는 사이코패스라고 불리우는 특징과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둘의 공통적인 특징들은 냉혹하고, 언변이 뛰어나고 피상적이며, 대인관계에서 착취적이고 공감을 못한다는 것이다.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뭔가 결여된 듯한 혹은 뭔가 넘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고 있다.
카리스마와 나르시시스트는 한끝차이라고 하였다. 더 쉽게 말하자면, 대중들이 볼 때 시작은 같다. 둘 다 매우 매력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고, 멋있고, 마음을 당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끝이 너무나도 다르다. 진정한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인은 대중의 진심을 사로잡고 어필하지 않아도 마음을 서로 주고 받는 신뢰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정치인은 자신감 있게 말을 많이 하는데 현실의 내 생활에는 아무 영향이 없는 것 같은, 그리고 나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며 외면 받게 된다.
앞서 언급 했던 것 처럼 2023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을 원하는 것은 비단 정치인의 역량부족만이 아닐 것이다. 예전의 정치인들에 비해 학벌도 좋고, 전문지식을 가졌으며, 성장 과정에서도 그 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경험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역량의 부족이 아닌 대중들이 보고자 혹은 느끼고자 하는 어떤 부분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바로 그것이 카리스마의 어원인 ‘풍요, 아름다움, 기쁨’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 정치인을 보면서 내 삶이 풍요로워 지고, 나에게 기쁨을 주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당연히 마음을 주고 지지하며 그 당이나 당원이 아니더라도 마음속에서 응원을 하는 공동체적인 마음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어떤지 생각해보자. 이 글을 시작하는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현재 대한민국은 마음을 사로잡는 정치인은 없고, ‘나를 위해주는 것 같은 말은 참 잘하는데, 실제로 보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 같고, 공감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며, 뭔가 기빨리는’ 정치인들을 매일 보고 있게 된다.
우스게소리지만, 지금의 정치판에선 아마도 카리스마가 내게 ‘칼 있으마’의 변형어라도 되는 양 칼 쥔 권력자임을 자랑하듯 하는 행태가 노정되고 있지는 않은지.
막스 베버(1864-1920)는 그의 저서 ‘Charisma and Disenchantment: the vocation lectures’에서 지배방식으로써 카리스마를 언급하였을 만큼 정치에서 카리스마는 정치인의 역량으로서 아주 중요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베버가 언급한 카리스마적 지배는 구체적이고 형상화 된 이즘적인 방법이 아닌 대중·국민들이 한 정치가의 방식에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끼고 그를 따르며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즉, Top-down 방식이 아닌 Bottom-up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카리스마의 어원을 살펴보면 정치인에게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더 분명해진다. 카리스마는 어원이 그리스어로 아프로디테의 3명의 동반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풍요, 아름다움, 기쁨이 바로 동반자이며, 이것을 통칭하는 것이 그리스어이자 카리스마의 어원인 Khris다. 그럼 카리스마를 느끼며, 그 작동 방법인 Bottom-up이 정치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정치인을 보며 ‘풍요, 아름다움, 기쁨’을 느끼는 것이 그 시작이 아닐까 한다.
카리스마를 논하다 보면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카리스마와 어쩌면 한끝차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막스 베버도 카리스마가 넘치며 자연스럽게 추대된 정치지도자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의 조국에서 맞이한 ‘불행한’ 리더는 바로 히틀러였다(한나 아렌트(1906~1975)에 의하면 히틀러는 정신질환자는 아니었고 사리분별이 분명하였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에 앞서 히틀러를 언급하는 것은 히틀러가 ‘그 한끝차이’의 다름을 가진 나르시시스트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굉장히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느끼고, 자신이 무언가 하지 않아도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역시 자신의 특별하고 고귀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대인관계에서도 착취적이며, 공감능력이 현격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나르시시스트는 ‘나는 굉장히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숭배하거나 따를 수 밖에 없고,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무슨 행동, 말을 하더라도 괜찮고, 용서받을 수 있으며, 너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너희들과 달라서 특별하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끔찍하게도 정신병리적으로 반사회성 성격장애, 최근에는 사이코패스라고 불리우는 특징과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둘의 공통적인 특징들은 냉혹하고, 언변이 뛰어나고 피상적이며, 대인관계에서 착취적이고 공감을 못한다는 것이다.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뭔가 결여된 듯한 혹은 뭔가 넘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고 있다.
카리스마와 나르시시스트는 한끝차이라고 하였다. 더 쉽게 말하자면, 대중들이 볼 때 시작은 같다. 둘 다 매우 매력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고, 멋있고, 마음을 당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끝이 너무나도 다르다. 진정한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인은 대중의 진심을 사로잡고 어필하지 않아도 마음을 서로 주고 받는 신뢰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정치인은 자신감 있게 말을 많이 하는데 현실의 내 생활에는 아무 영향이 없는 것 같은, 그리고 나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며 외면 받게 된다.
앞서 언급 했던 것 처럼 2023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을 원하는 것은 비단 정치인의 역량부족만이 아닐 것이다. 예전의 정치인들에 비해 학벌도 좋고, 전문지식을 가졌으며, 성장 과정에서도 그 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경험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역량의 부족이 아닌 대중들이 보고자 혹은 느끼고자 하는 어떤 부분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바로 그것이 카리스마의 어원인 ‘풍요, 아름다움, 기쁨’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 정치인을 보면서 내 삶이 풍요로워 지고, 나에게 기쁨을 주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당연히 마음을 주고 지지하며 그 당이나 당원이 아니더라도 마음속에서 응원을 하는 공동체적인 마음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어떤지 생각해보자. 이 글을 시작하는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현재 대한민국은 마음을 사로잡는 정치인은 없고, ‘나를 위해주는 것 같은 말은 참 잘하는데, 실제로 보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 같고, 공감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며, 뭔가 기빨리는’ 정치인들을 매일 보고 있게 된다.
우스게소리지만, 지금의 정치판에선 아마도 카리스마가 내게 ‘칼 있으마’의 변형어라도 되는 양 칼 쥔 권력자임을 자랑하듯 하는 행태가 노정되고 있지는 않은지.
광남일보@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