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수녀와 예술가를 위한 세상은 없다’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입력 : 2023. 09. 07(목) 18:08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문화산책] 연일 뉴스는 전쟁과 불경기와 당파간의 정쟁과 온갖 엽기적인 사건 사고와 기상이변, 일본원전 오염수 방류에 관한 소식들을 장마 비처럼 쏟아내고 있다.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필부(匹夫)들의 삶에 대한 의욕과 희망은 여지없이 꺾이고 만다.

내가 아는 한 법대 교수는 술자리에서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은 농부와 수녀를 위한 세상이 아니고 도둑과 창녀를 위한 세상이다.” 원래 세상이란 이런 곳이니 알아서 적당히 요령껏 잘 처신하고 살아가라는 취지였다. 검찰청의 사무관으로 있는 친구가 술자리에서 자주 하는 말이 또 있다. “야, 요즘 세상에 사람 좋다는 말, 순진하다는 말은 진짜 다 욕이다.” 세상이 그토록 각박하고 무서우니 호구되지 말고 독하게 살아야 한다는 취지다.

내가 좋아하는 한 학원 강사가 있다. 유튜브에서 그의 새로운 영상을 찾아보는 것도 나에게는 큰 재미다. 그는 학원가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인생에 큰 부침(浮沈)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성공한 유명인이다. 그가 본인의 인생 경험을 근거로 인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대강 이런 내용이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마라. 인간은 본디 이기적이며 항상 배신하는 동물이다. 소중한 사람이 있거든 잘 관리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강생 여러분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하기야 인간들의 배신의 역사는 길다. 예수님의 지근거리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했던 제자들마저도 배신을 했었다.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반대파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까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했다. 심지어 저주를 퍼부으며 부인한 후 목숨을 부지하고 ‘네가 새벽닭이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떠올라 통곡한다.

예전에 크게 히트했던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대사인데 내 인생의 경험칙 상 너무나 동의하는 말이다. “내가 이번에 바닥을 치면서 기분 참 더러울 때가 많았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사람이 딱 걸려져. 진짜 내 편과 내 편을 가장한 적(敵). 인생에서 가끔 큰 시련이 오는 거 한 번씩 진짜와 가짜를 걸러 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큰 기회가 아닌가 싶다.”

우리 지역에는 모든 예술 장르에 걸쳐 엄청나게 많은 프리랜서 예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문제는 고정수입이 없는 이들의 만성적인 생활고다. 요즘 제도권 밖에 있는 지역 예술가들의 고통과 불만은 거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예술가들이라고 물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하다. 제도권 밖 예술가들의 삶이 너무 힘들다보니 이제 드디어 원망과 투쟁의 대상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시립예술단 같은 제도권안의 예술가들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같은 업계의 동업자라면 동업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술 하는 사람들끼리 어쩌다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소득 불균형에 대한 잘못과 책임이 제도권 안의 예술가에게 있지는 않을 뿐더러 그들이 지역 예술계의 파이를 독점하고 있다는 주장도 너무 과하다. 그런데 또 제도권 밖의 프리랜서 예술가들의 예술성이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단지 우리 세상이 농부와 수녀와 예술가를 위한 세상이 아닐 뿐이다.

나도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 입장에서 그동안 이 예술가들을 키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수고했을 그 부모들의 눈물 나는 고충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어렵사리 유학까지 보냈었는데 지역에 돌아와서는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에 얼마나 기가 막혀할지 그 자식을 향한 안타까움과 걱정들을 이해한다. 광주를 ‘문화수도’니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니 하는데 어째 자꾸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 같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놈의 예술 타령이냐는 사람들도 많다.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진심으로 제도권 밖의 프리랜서 예술가들에게도 당신들 탓이 아니라는 위로와 응원을 전하면서 지역 여건이 개선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이 이러니 오늘도 내 아이에 대한 걱정이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어 학교공부, 학원 공부에 치여 늦은 밤 책상머리에서 속절없이 잠이 들어버리고만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부모가 가지 말란다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PC방을 가보지 않았을 정도로 너무 말을 잘 듣고 벌써부터 군대 갈 걱정을 하는 겁도 많고 낯가림이 심한 아이라서 요즘 들어 더욱 걱정이 생긴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위험하고 거칠기가 마치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서 형제 한명도 없이 외동이인 아이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 부모가 없을 때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와 상의하면서 이 엄혹한 세파를 헤쳐 나갈까 하는 걱정들에 금방 날이 새고 만다.

절대 실현될 수 없는 무슨 동화 같은 바람일지 모르지만 나의 아이는 ‘농부와 수녀와 예술가를 위한 세상’에서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광남일보@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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