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 한국 광복군의 역사적 의미
박찬용 (사)광주한백통일재단 상임대표, 정치학 박사
입력 : 2023. 09. 04(월) 15:50

[광남시론]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전 할 수 있다는 국방부의 발표와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등으로 온 나라가 역사이념논쟁이 뜨거운 상황에서 지난달 13일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출신 오성규(100) 애국지사가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날 국방부 의장대가 도열하고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어린이역사합창단은 오 지사가 광복군 복무 당시 불렀던 ‘광복군 제3지대가’를 노래했다. 1923년생인 오지사는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봉천 소재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했고 일제에 조직망이 노출되자 만주를 탈출해 중국 안후이성의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수도인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됐다.
광복군의 핵심간부들은 거의 만주 독립군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독립군의 전투역량·작전·지휘·조직 등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 광복군이었다. 광복군은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그리고 단위부대인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에 공진원, 제3지대장에 김학규 등이 광복군의 핵심간부로 선임됐다. 이들은 1920년 이래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만주지역 양대 무장 세력인 북만주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에서 역전의 명장으로 활동했던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 국군과 독립군의 30여년에 걸친 항일 투쟁의 역량을 계승한 광복군은 ‘혁명군’이자 ‘건국군’으로서 자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는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내외에 공포했다. 이 선언에서 임시정부는 독자적이며 자주권을 가진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의지와 광복군의 성격이 연합군임을 천명했다. 광복군은 기관지 광복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선전했다. 1942년 이후 광복군은 태평양 전선의 전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연합군과 군사합작 및 공동작전을 수행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미군과의 군사합작을 중시하였고 교전 단체로 참여하여 전후 발언권 강화를 위해 한·미공동작전과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했다. 광복군이 미국·영국과 합작하여 참전한 것은 한국 독립운동의 공간을 확대하고 그 위상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한민족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일본군과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의 전략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일 전쟁을 전개함으로서 전후 교전단체의 지위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 광복군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기간을 정하여 사업 목표와 소요예산을 수립하고 광복군을 선봉으로 중국 관내지역에서 출발하여 중국 동삼성 지역을 거쳐 3단계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고자 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조국광복을 기약하면서 동지들과 여러 가지 전략을 의논했다. 첫째, 애국지사를 규합한다. 둘째, 국민교육을 장려한다. 셋째,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넷째, 독립운동자금을 준비한다. 그 후에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하고 미일 러일 청일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그 기회를 틈타서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군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독립군의 활동은 악조건에 놓이게 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로 독립군의 중심지가 중국본토로 옮겨지게 됐다.
광복군은 1942년 독립운동 전략으로 무장군인 10만 명, 유격대원 35만 명 등, 군대의 확대조직개편에 목표를 세웠다. 광복군이 탄생함으로 민족독립운동의 역량은 한곳으로 집중됐다. 임시정부는 국무 위원제에서 주석제로 바뀜으로 주석은 임시정부의 국가원수가 되어 정부의 행정권을 장악했으며, 국군 통수권을 수행하여 광복군에 의해 임시정부는 정통성을 보장받게 되었다.
광복군은 외세를 물리치고 근대적인 나라를 건설하는데 목적을 두었고 그것을 성취했다. 오늘 한국의 역사적 지평 속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주창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광복군이다.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는 광복운동의 목적을 문화국가의 건설과 근대적인 나라건설을 함께 구상했다. 그는 국민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고 그 가장 기본은 민주적인 체제이다.
광복군의 지휘권 문제를 놓고 1940년 5월 중국과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김구는 좌절하지 않고,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없어지지 아니하며, 버들가지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고 강조하며 이청천 사령관을 격려했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 홍범도와 정율성 역사공원등의 이념논쟁으로 대단히 어지럽다. 주지하듯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한국 광복군의 큰뜻으로 국민적인 공감대를 만들고, 우리 모두가 기본으로 돌아가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차원에서 역사이념논쟁이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광복군의 핵심간부들은 거의 만주 독립군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독립군의 전투역량·작전·지휘·조직 등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 광복군이었다. 광복군은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그리고 단위부대인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에 공진원, 제3지대장에 김학규 등이 광복군의 핵심간부로 선임됐다. 이들은 1920년 이래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만주지역 양대 무장 세력인 북만주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에서 역전의 명장으로 활동했던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 국군과 독립군의 30여년에 걸친 항일 투쟁의 역량을 계승한 광복군은 ‘혁명군’이자 ‘건국군’으로서 자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는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내외에 공포했다. 이 선언에서 임시정부는 독자적이며 자주권을 가진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의지와 광복군의 성격이 연합군임을 천명했다. 광복군은 기관지 광복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선전했다. 1942년 이후 광복군은 태평양 전선의 전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연합군과 군사합작 및 공동작전을 수행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미군과의 군사합작을 중시하였고 교전 단체로 참여하여 전후 발언권 강화를 위해 한·미공동작전과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했다. 광복군이 미국·영국과 합작하여 참전한 것은 한국 독립운동의 공간을 확대하고 그 위상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한민족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일본군과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의 전략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일 전쟁을 전개함으로서 전후 교전단체의 지위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 광복군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기간을 정하여 사업 목표와 소요예산을 수립하고 광복군을 선봉으로 중국 관내지역에서 출발하여 중국 동삼성 지역을 거쳐 3단계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고자 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조국광복을 기약하면서 동지들과 여러 가지 전략을 의논했다. 첫째, 애국지사를 규합한다. 둘째, 국민교육을 장려한다. 셋째,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넷째, 독립운동자금을 준비한다. 그 후에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하고 미일 러일 청일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그 기회를 틈타서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군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독립군의 활동은 악조건에 놓이게 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로 독립군의 중심지가 중국본토로 옮겨지게 됐다.
광복군은 1942년 독립운동 전략으로 무장군인 10만 명, 유격대원 35만 명 등, 군대의 확대조직개편에 목표를 세웠다. 광복군이 탄생함으로 민족독립운동의 역량은 한곳으로 집중됐다. 임시정부는 국무 위원제에서 주석제로 바뀜으로 주석은 임시정부의 국가원수가 되어 정부의 행정권을 장악했으며, 국군 통수권을 수행하여 광복군에 의해 임시정부는 정통성을 보장받게 되었다.
광복군은 외세를 물리치고 근대적인 나라를 건설하는데 목적을 두었고 그것을 성취했다. 오늘 한국의 역사적 지평 속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주창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광복군이다.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는 광복운동의 목적을 문화국가의 건설과 근대적인 나라건설을 함께 구상했다. 그는 국민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고 그 가장 기본은 민주적인 체제이다.
광복군의 지휘권 문제를 놓고 1940년 5월 중국과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김구는 좌절하지 않고,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없어지지 아니하며, 버들가지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고 강조하며 이청천 사령관을 격려했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 홍범도와 정율성 역사공원등의 이념논쟁으로 대단히 어지럽다. 주지하듯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한국 광복군의 큰뜻으로 국민적인 공감대를 만들고, 우리 모두가 기본으로 돌아가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차원에서 역사이념논쟁이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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