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쳐로서의 디카시 발전을 위하여
강경호 시인·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입력 : 2023. 03. 23(목) 17:51

강경호 시인·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문화산책] 언젠가부터 우리 문단에 디카시가 출현하여 많은 시인이 이에 참여하고 있다. 시의 위기 시대라고 불리는 현 상황에 디카시는 자연과 사물에서 만나는 감동, 즉 정서적 충격을 휴대폰에 장착된 카메라를 이용하여 사진으로 포착해 그 즉시 감동을 시로 형상화한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종이책으로 제작하기 전에 인터넷을 이용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멀티포엠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생산하고 소비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많은 독자가 디카시를 즐길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이때 정서적 충격을 ‘날것의 언어’, 즉 직관에 의한 언어를 사진 이미지와 문자 언어라는 두 기호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시적 기능을 하는 것에서 기존의 사진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 디카시인들이 디카시를 쓰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예술과 과학은 만나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과학은 언제나 정확한 정답을 요구하였지만, 예술은 정답이 다양하므로 과학의 원리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과학과 미술을 접목함으로써 현대미술의 지평을 열어 과학과 예술은 어울릴 수 없다는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였다.
디카시 역시 디지털카메라라는 과학과 시가 한데 어울려 하나의 예술 장르로 정착하는 데서 매력을 느끼고 많은 사람이 디카시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대다수 시인이 디카시에 그리 탐탁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시의 기호인 언어가 문자인 데 반해 거기에 사진까지 끌어오는 것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디카시 이전에 이른바 사진시가 있었다. ‘포토포엠’은 문자시가 주가 되고 사진은 보조적인 기능을 하였다. 즉, 시인들의 탐탁찮음은 디카시에서 시와 사진의 기능을 1:1로 이해하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많은 디카시에서 사진이 글에 종속된 하나의 보조기능을 하고 있다는 혐의를 갖고 있다. 디카시 이론에서조차 이러한 결과물에 대해서 ‘시인의 양심에 맡긴다’고 하고 있다. 이론은 정립되었지만 실제로 그 이론을 지켰는지, 또는 이론이 가능한지 검증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이 디카시이다. 그리고 5행 이내의 짧은 시를 써야 한다는 규정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시인들도 있다. 여기서 ‘5행 이내의 시’라는 규정은 극순간의 감흥을 때 묻지 않은 언어인 ‘날것의 언어’를 위한 제한이라고 여겨지는데, 이런 규정을 지킨 디카시들조차도 수긍하기 힘들 정도로 감흥이 없고, 참신함을 찾기 어렵다. 이러한 디카시의 현실 탓에 많은 시인이 디카시의 정체성에 반하는 작품들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한편으로 시인들이 디카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수많은 디카시가 먼저 사진을 찍고 한참 나중에 사진에 대한 느낌을 시로 형상화했다는 혐의를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카시라는 이름으로 쓴 작품 중에는 실제로도 많은 것에서 디카시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 불안해하고 믿지 못한다. 그리고 사진이 가진 이미지에 의해 글의 의미와 시적 정서가 제한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디카시의 미래를 불안하게 볼 수밖에 없다.
디카 사진들이 찍는 피사체는 대부분 구상적이다. 어떤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자면 구상적인 회화작품이 추상이나 비구상작품보다 공간 구성과 사물의 윤곽을 사실적으로 나타낼 때 작품을 감상하며 발휘하는 상상력이 축소되고 제한될 수밖에 없다. 비구상이나 추상은 그것이 어떤 사물인지는 정확하게 나타내지 않지만, 보다 다양한 상상력의 발현이 가능해 작품의 의미를 구속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상적인 모습을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디카시는 시작과 동시에 많은 시인에게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구상적인 사진이미지가 모두 시적 의미나 메시지를 구속하거나 축소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카메라, 또는 사진의 속성을 잘 이해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사진 이미지뿐만 아니라 문자시가 사진과 조화를 이루어 그야말로 새로운 시를 표현했을 때 우리가 원하는 디카시의 본질에 가닿은 훌륭한 디카시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디카시가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중국에까지 전파하여 K컬쳐의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저변에는 한국인의 창의성과 예술적 기질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디카시의 확산을 뒷받침해주고, 지금까지의 디카시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와 훌륭한 작품을 쓰겠다는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
본래 예술과 과학은 만나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과학은 언제나 정확한 정답을 요구하였지만, 예술은 정답이 다양하므로 과학의 원리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과학과 미술을 접목함으로써 현대미술의 지평을 열어 과학과 예술은 어울릴 수 없다는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였다.
디카시 역시 디지털카메라라는 과학과 시가 한데 어울려 하나의 예술 장르로 정착하는 데서 매력을 느끼고 많은 사람이 디카시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대다수 시인이 디카시에 그리 탐탁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시의 기호인 언어가 문자인 데 반해 거기에 사진까지 끌어오는 것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디카시 이전에 이른바 사진시가 있었다. ‘포토포엠’은 문자시가 주가 되고 사진은 보조적인 기능을 하였다. 즉, 시인들의 탐탁찮음은 디카시에서 시와 사진의 기능을 1:1로 이해하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많은 디카시에서 사진이 글에 종속된 하나의 보조기능을 하고 있다는 혐의를 갖고 있다. 디카시 이론에서조차 이러한 결과물에 대해서 ‘시인의 양심에 맡긴다’고 하고 있다. 이론은 정립되었지만 실제로 그 이론을 지켰는지, 또는 이론이 가능한지 검증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이 디카시이다. 그리고 5행 이내의 짧은 시를 써야 한다는 규정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시인들도 있다. 여기서 ‘5행 이내의 시’라는 규정은 극순간의 감흥을 때 묻지 않은 언어인 ‘날것의 언어’를 위한 제한이라고 여겨지는데, 이런 규정을 지킨 디카시들조차도 수긍하기 힘들 정도로 감흥이 없고, 참신함을 찾기 어렵다. 이러한 디카시의 현실 탓에 많은 시인이 디카시의 정체성에 반하는 작품들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한편으로 시인들이 디카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수많은 디카시가 먼저 사진을 찍고 한참 나중에 사진에 대한 느낌을 시로 형상화했다는 혐의를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카시라는 이름으로 쓴 작품 중에는 실제로도 많은 것에서 디카시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 불안해하고 믿지 못한다. 그리고 사진이 가진 이미지에 의해 글의 의미와 시적 정서가 제한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디카시의 미래를 불안하게 볼 수밖에 없다.
디카 사진들이 찍는 피사체는 대부분 구상적이다. 어떤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자면 구상적인 회화작품이 추상이나 비구상작품보다 공간 구성과 사물의 윤곽을 사실적으로 나타낼 때 작품을 감상하며 발휘하는 상상력이 축소되고 제한될 수밖에 없다. 비구상이나 추상은 그것이 어떤 사물인지는 정확하게 나타내지 않지만, 보다 다양한 상상력의 발현이 가능해 작품의 의미를 구속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상적인 모습을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디카시는 시작과 동시에 많은 시인에게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구상적인 사진이미지가 모두 시적 의미나 메시지를 구속하거나 축소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카메라, 또는 사진의 속성을 잘 이해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사진 이미지뿐만 아니라 문자시가 사진과 조화를 이루어 그야말로 새로운 시를 표현했을 때 우리가 원하는 디카시의 본질에 가닿은 훌륭한 디카시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디카시가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중국에까지 전파하여 K컬쳐의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저변에는 한국인의 창의성과 예술적 기질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디카시의 확산을 뒷받침해주고, 지금까지의 디카시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와 훌륭한 작품을 쓰겠다는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
광남일보@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