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 노하우 생겨…독창적 예술세계 구축할 터"
[남도예술인] 서양화가 오수경
조부·부친 그림자 너무 커 부담됐지만 자부심으로 생각
예술적 철학 뒷전 자성…레퍼런스 작가 중심 독서 예정
자신만의 회화 구축 지속하며 ‘오승윤미술관' 건립이 꿈
조부·부친 그림자 너무 커 부담됐지만 자부심으로 생각
예술적 철학 뒷전 자성…레퍼런스 작가 중심 독서 예정
자신만의 회화 구축 지속하며 ‘오승윤미술관' 건립이 꿈
입력 : 2022. 06. 09(목)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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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앞에서 포즈를 취한 오 작가
조부와 부친의 존재로 인해 미술은 그에게 숙명같은 게 아닐까 여겨졌다. 그의 조부는 서양화가 오지호 선생(1905∼1982)이고, 부친은 오승윤 화백(1939∼2006)이다. 오지호 선생은 한국적 인상주의를 정착시킨 근현대 서양화의 대가이고 생전 조선대 교수와 국전 심사위원장 등을, 오승윤 화백은 한국 서양화단의 거장으로 전남대 예술대학 교수 등을 두루 역임했다. 오지호 선생은 동양화가인 의재 허백련 선생과 호남 근대회화의 양대산맥으로 통했다.
이런 집안의 배경이 그에게 미술이 숙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고 자란 것이다. 아무리 잘해도 조부와 부친의 그림자가 너무 커 뛰어넘기는 어려울 법한데 거기에 질식하지 않고 오히려 자부심으로 생각하며 화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지난 2006년 한 사건으로 광주미술계는 충격을 받았다. 부친인 오승윤 화백이 급작스럽게 별세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멘토 역할을 기꺼이 했던 아버지의 부재라고 하는 정신적 충격은 차마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 아픔이 있으면 더 단단해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그에게서 그런 인상을 쉽게 지울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의 자리는 숙명같은 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조부와 부친의 그림자로부터 도망 혹은 탈주하고 싶었을텐데 붓을 꺾지 않고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더욱이 근래 미국 텍사스에서 5년간 체류하는 동안 타국에서의 헛헛하고 적적한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5년 만에 고향 광주에서 전시(제8회 개인전 4.29∼6.28 광주롯데갤러리)를 열고 있는 서양화가 오수경씨다. 3대째 서양화를 일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오 작가를 최근 전시가 진행 중인 롯데갤러리에서 만나 회화 전반에 대해 들어봤다.

먼저 부친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2006년 부친의 별세 후 법정 소송을 하며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대형화랑의 횡포를 느낀 뒤 붓을 꺾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자신에게 아버지는 자존심의 전부였다. 그 자존심을 생각하며 예술의 길을 반추했다. 오히려 작품의 동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전 그에게 미술대학 진학은 물론이고 화가로서의 정신적 자세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유치하게 그림을 그려도 좋다는 것과 남의 작품은 좋아 보인다는 것을 강조하셨죠. 그것은 아마 제가 자라면서 자존감이 낮은 이유 때문이었을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없다 생각했구요. 모든 화가들이 다 똑같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뜻이었겠죠. 한번은 제게 아버지가 그림을 그려서 먹고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을 친구들에게 들려줬더니 진짜로 그런 대가께서 그렇게 말했냐고 묻더군요.”
복잡하지 않게, 딸이 헷갈릴만한 것들을 사전에 바로잡아준 대화로 이해됐다. 그리고 아버지와 딸 사이 소소한 대화마저 화단의 대가라는 격식이 적용되기를 바라는 친구들의 반응에서처럼 부친인 오승윤 화백은 그 존재로 이름값을 해낸 화가였다. 풍수 샤머니즘 등을 투영해 한국적 정서를 녹여내 오방정색으로 승화,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일궜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친 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오지호라고 하는 회화 거봉과 또 다른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오 작가의 부친 역시 꼬리표처럼 조부(오지호)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을 것이다. 아버지가 큰 그림자였던 조부가 있었듯, 오 작가에게는 부친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을 법하다. 그 그림자의 유효기간은 여전히 진행 중일지 모른다. 부친이 조부의 그림자를 벗어나 독보적 자기 화풍을 끌어내 미술계의 호평을 이끌어냈듯, 오 작가도 부친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일구는 것이 마지막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친으로부터 배운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대형화랑과의 전속계약은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요즘 대형 화랑과 전속계약을 하면 작품 판매가 많이 되고 유명해질 수 있어 유혹을 지워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잘못된 유혹에 빠질까봐 이 점 또한 자신에게 말해준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작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집안의 미술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경우에 속한다. 성장하면 미술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절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 말이다. 조부와 부친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며 성장한 것이다. 대학 진학까지 일일이 챙겨준 이가 그의 부친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양화과를 추천했고, 홍대와 이화여대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를 이화여대로 진학해 공부할 것을 추천한 이도 그의 부친이었다.
“아버지는 홍대를 졸업하셔서 홍대를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홍대의 패턴을 계속 지켜봐 왔던 것 같아요. 오로지 여성작가로서의 위치를 당신 나름대로 생각하셨던 듯 싶습니다. 이대 서양화과에 진학해 그림을 배우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셨죠. 아버지의 제안 대로 했지만 처음에 조금 서운했죠. 제 의사가 반영안되는 듯해서요. 여기다 대학을 짚어준 것처럼 아크릴 대신 꼭 유화와 구상회화를 할 것을 제안했죠.”

그는 이렇게 해서 1988년부터 1996년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아카데믹한 미술공부를 이어나갔다. 이런 저런 고민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1997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한 첫 개인전을 광주에서 열 수 있었다. 다만 아버지의 말처럼 유화나 구상회화를 추구하다 보니 컨템포러리 아트로부터 멀어졌고, 실험이 드물어졌다. 또 평면이 대다수가 된 이유로 풀이했다. 물론 오랜 유화 작업과 구상회화 작업으로 인해 노하우가 생겨 지금은 자유자재로 그것에 대해 구사를 한다는 귀띔을 잊지 않았다.
“유화를 줄곧 하다보니 축적이 됐고 노하우가 생겼죠. 재료 하나만 집중하니까 어떻게 하면 현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 구상회화를 통해 예술세계가 어떻게 하면 깊어질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요. 그런데 구상회화는 자신만의 독보적 예술세계를 보여주기가 어렵죠.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 등에서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마네의 실제 작품도 봤구요. 그는 구상회화와 유화 한 분야로 그림을 추구했어요. 한쪽 귀퉁이를 모호하게 처리, 기존 틀을 깨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했죠. 저도 그러고 싶어요.”

오 작가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추상화 계열 작업에 몰두했고, 2003년부터 2017년까지 꽃 그림에 주력했으며 2017년 이후 물고기 등 자연으로 소재를 확장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롯데갤러리에서의 전시(4.29~6.28)는 가장 최근의 화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 이전 5년 동안 미국 텍사스에 머물며 작업을 해왔다. 미국에서의 작업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객관적 사유를 정립한 시기였고, 작가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자 성찰을 통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기회가 된 듯하다. 타국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쩌면 미술적 집중을 더할 수 있는 동력이 돼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그는 근래들어 ‘왜 사과와 물고기를 그리는지 철학적 고찰을 많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다보니 예술적 철학이 뒷전에 있었다는 자성인 셈이다. 에두아르 마네나 미국 사실주의 화가 애드워드 호퍼, 미국 대표 팝아트 작가 알렉스 카츠 등 레퍼런스를 할 수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독서를 통해 타개해볼 심산이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화풍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는 외에 부친의 회화세계를 정립하고 보존할 수 있는 공간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오승윤미술관’ 건립을 위해 분주하다.
오지호가 초가집 뒤 어머니 소유로 있는 396.7㎡(120평)의 부지에 건립하고 싶은 꿈이 있다. 해당 지자체인 광주시 동구에 이미 제안을 한 상태다. 하지만 동구는 ‘오지호미술관’이나 ‘오지호가미술관’을 고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오 작가는 조부의 작품이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부돼 단 한점이 없는데다 아버지 형제들이 2남5녀로 그 후손이 많아 나중에 송사에 휘말릴 우려가 있고, 전남 화순에 조부의 미술공간이 있는 점을 들어 오지호미술관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대신 오승윤미술관이어야 하는 이유로 부친의 작품이 모두 확보돼 있어 미술관을 꾸밀 수 있는 콘텐츠가 충분하고 아직 광주에 오승윤 관련 공간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집안내력을 이해하지 못한듯한 동구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숙제로 인식됐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 못지 않게 부친의 미술관 건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ㅎ갤러리에서 전시를 앞두고 돌아가셨잖아요. 오승윤미술관을 건립해 돌아가셔서 보여주지 못한 그림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모두가 오지호미술관을 지어야 한다고 하지만 저희가 소장한 할아버지의 작품은 없어요. 할아버지 집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초가집 뒤에 오승윤미술관을 지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미술관이 지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나가야죠.”
이런 집안의 배경이 그에게 미술이 숙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고 자란 것이다. 아무리 잘해도 조부와 부친의 그림자가 너무 커 뛰어넘기는 어려울 법한데 거기에 질식하지 않고 오히려 자부심으로 생각하며 화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롯데갤러리 전시 전경
지난 2006년 한 사건으로 광주미술계는 충격을 받았다. 부친인 오승윤 화백이 급작스럽게 별세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멘토 역할을 기꺼이 했던 아버지의 부재라고 하는 정신적 충격은 차마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 아픔이 있으면 더 단단해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그에게서 그런 인상을 쉽게 지울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의 자리는 숙명같은 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조부와 부친의 그림자로부터 도망 혹은 탈주하고 싶었을텐데 붓을 꺾지 않고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더욱이 근래 미국 텍사스에서 5년간 체류하는 동안 타국에서의 헛헛하고 적적한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5년 만에 고향 광주에서 전시(제8회 개인전 4.29∼6.28 광주롯데갤러리)를 열고 있는 서양화가 오수경씨다. 3대째 서양화를 일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오 작가를 최근 전시가 진행 중인 롯데갤러리에서 만나 회화 전반에 대해 들어봤다.

롯데갤러리에서 전시를 감상하는 감상객들.
먼저 부친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2006년 부친의 별세 후 법정 소송을 하며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대형화랑의 횡포를 느낀 뒤 붓을 꺾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자신에게 아버지는 자존심의 전부였다. 그 자존심을 생각하며 예술의 길을 반추했다. 오히려 작품의 동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전 그에게 미술대학 진학은 물론이고 화가로서의 정신적 자세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유치하게 그림을 그려도 좋다는 것과 남의 작품은 좋아 보인다는 것을 강조하셨죠. 그것은 아마 제가 자라면서 자존감이 낮은 이유 때문이었을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없다 생각했구요. 모든 화가들이 다 똑같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뜻이었겠죠. 한번은 제게 아버지가 그림을 그려서 먹고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을 친구들에게 들려줬더니 진짜로 그런 대가께서 그렇게 말했냐고 묻더군요.”
복잡하지 않게, 딸이 헷갈릴만한 것들을 사전에 바로잡아준 대화로 이해됐다. 그리고 아버지와 딸 사이 소소한 대화마저 화단의 대가라는 격식이 적용되기를 바라는 친구들의 반응에서처럼 부친인 오승윤 화백은 그 존재로 이름값을 해낸 화가였다. 풍수 샤머니즘 등을 투영해 한국적 정서를 녹여내 오방정색으로 승화,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일궜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친 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오지호라고 하는 회화 거봉과 또 다른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오 작가의 부친 역시 꼬리표처럼 조부(오지호)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을 것이다. 아버지가 큰 그림자였던 조부가 있었듯, 오 작가에게는 부친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을 법하다. 그 그림자의 유효기간은 여전히 진행 중일지 모른다. 부친이 조부의 그림자를 벗어나 독보적 자기 화풍을 끌어내 미술계의 호평을 이끌어냈듯, 오 작가도 부친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일구는 것이 마지막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양귀비’
그가 부친으로부터 배운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대형화랑과의 전속계약은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요즘 대형 화랑과 전속계약을 하면 작품 판매가 많이 되고 유명해질 수 있어 유혹을 지워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잘못된 유혹에 빠질까봐 이 점 또한 자신에게 말해준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작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집안의 미술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경우에 속한다. 성장하면 미술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절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 말이다. 조부와 부친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며 성장한 것이다. 대학 진학까지 일일이 챙겨준 이가 그의 부친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양화과를 추천했고, 홍대와 이화여대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를 이화여대로 진학해 공부할 것을 추천한 이도 그의 부친이었다.
“아버지는 홍대를 졸업하셔서 홍대를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홍대의 패턴을 계속 지켜봐 왔던 것 같아요. 오로지 여성작가로서의 위치를 당신 나름대로 생각하셨던 듯 싶습니다. 이대 서양화과에 진학해 그림을 배우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셨죠. 아버지의 제안 대로 했지만 처음에 조금 서운했죠. 제 의사가 반영안되는 듯해서요. 여기다 대학을 짚어준 것처럼 아크릴 대신 꼭 유화와 구상회화를 할 것을 제안했죠.”

‘사계’
그는 이렇게 해서 1988년부터 1996년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아카데믹한 미술공부를 이어나갔다. 이런 저런 고민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1997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한 첫 개인전을 광주에서 열 수 있었다. 다만 아버지의 말처럼 유화나 구상회화를 추구하다 보니 컨템포러리 아트로부터 멀어졌고, 실험이 드물어졌다. 또 평면이 대다수가 된 이유로 풀이했다. 물론 오랜 유화 작업과 구상회화 작업으로 인해 노하우가 생겨 지금은 자유자재로 그것에 대해 구사를 한다는 귀띔을 잊지 않았다.
“유화를 줄곧 하다보니 축적이 됐고 노하우가 생겼죠. 재료 하나만 집중하니까 어떻게 하면 현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 구상회화를 통해 예술세계가 어떻게 하면 깊어질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요. 그런데 구상회화는 자신만의 독보적 예술세계를 보여주기가 어렵죠.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 등에서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마네의 실제 작품도 봤구요. 그는 구상회화와 유화 한 분야로 그림을 추구했어요. 한쪽 귀퉁이를 모호하게 처리, 기존 틀을 깨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했죠. 저도 그러고 싶어요.”

‘내 기억 안 무등’
오 작가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추상화 계열 작업에 몰두했고, 2003년부터 2017년까지 꽃 그림에 주력했으며 2017년 이후 물고기 등 자연으로 소재를 확장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롯데갤러리에서의 전시(4.29~6.28)는 가장 최근의 화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 이전 5년 동안 미국 텍사스에 머물며 작업을 해왔다. 미국에서의 작업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객관적 사유를 정립한 시기였고, 작가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자 성찰을 통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기회가 된 듯하다. 타국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쩌면 미술적 집중을 더할 수 있는 동력이 돼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그는 근래들어 ‘왜 사과와 물고기를 그리는지 철학적 고찰을 많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다보니 예술적 철학이 뒷전에 있었다는 자성인 셈이다. 에두아르 마네나 미국 사실주의 화가 애드워드 호퍼, 미국 대표 팝아트 작가 알렉스 카츠 등 레퍼런스를 할 수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독서를 통해 타개해볼 심산이다.

서양화가 오수경씨는 “유화를 줄곧 하다보니 축적이 됐고 노하우가 생겼다. 재료 하나만 집중하니까 어떻게 하면 현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 구상회화를 통해 예술세계가 어떻게 하면 깊어질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화풍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는 외에 부친의 회화세계를 정립하고 보존할 수 있는 공간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오승윤미술관’ 건립을 위해 분주하다.
오지호가 초가집 뒤 어머니 소유로 있는 396.7㎡(120평)의 부지에 건립하고 싶은 꿈이 있다. 해당 지자체인 광주시 동구에 이미 제안을 한 상태다. 하지만 동구는 ‘오지호미술관’이나 ‘오지호가미술관’을 고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오 작가는 조부의 작품이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부돼 단 한점이 없는데다 아버지 형제들이 2남5녀로 그 후손이 많아 나중에 송사에 휘말릴 우려가 있고, 전남 화순에 조부의 미술공간이 있는 점을 들어 오지호미술관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대신 오승윤미술관이어야 하는 이유로 부친의 작품이 모두 확보돼 있어 미술관을 꾸밀 수 있는 콘텐츠가 충분하고 아직 광주에 오승윤 관련 공간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집안내력을 이해하지 못한듯한 동구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숙제로 인식됐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 못지 않게 부친의 미술관 건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ㅎ갤러리에서 전시를 앞두고 돌아가셨잖아요. 오승윤미술관을 건립해 돌아가셔서 보여주지 못한 그림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모두가 오지호미술관을 지어야 한다고 하지만 저희가 소장한 할아버지의 작품은 없어요. 할아버지 집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초가집 뒤에 오승윤미술관을 지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미술관이 지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나가야죠.”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