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시론]친아들을 죽인 조선의 왕들
배호남 초당대 교수(문학박사)
입력 : 2020. 08. 03(월) 18:57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친아들을 죽인 왕이 한 명 있다. 바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다. 당시 영조의 정치적 기반은 노론이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지만, 즉위 5년만인 1728년 3월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으로 흔들리게 된다. 소론 측은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 측 대신들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심지어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비방까지 나붙게 된다. 1978년 3월 반군이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시작된 이인좌의 난은 그해 4월 진압되지만, 이 난으로 인해 영조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론에 더 의지하게 되면서 탕평의 뜻이 흔들리게 된다.
영조는 숙종의 적자(嫡子)도 아니고 장자(長子)도 아니었다. 이 사실이 영조 정권의 정통성을 계속해서 흔들었다. 사도세자 역시 영조의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었다.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영조의 나이는 이미 42세였다. 그래서 서둘러 세자로 책봉되고 15세부터 대리청정을 세웠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도세자는 노론보다는 소론 측에 기우는 인사를 펼치면서, 제대로 된 탕평책을 펼치며 노론을 견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노론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사도세자를 비방하며 영조에게 갖은 고변을 일러바쳤다. 이때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호되게 꾸짖었는데, 이로 인해 세자는 일종의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게 된다. 게다가 사도세자는 의복에 대한 결벽증세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의복을 책임지는 나인과 궁녀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10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사도세자는 자신이 죽인 나인의 머리를 잘라 손에 들고 궁 안을 배회하기까지 했다. 이를테면 궁궐 안의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이었던 것이다. 이에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일파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 10가지를 상소하였고, 이게 분개한 영조는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한다. 세자가 이에 불복하니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 28세였다.
실록에 정사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아들인 세자를 죽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임금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인조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 즉위했다. 서궁에 유폐돼 있던 인목대비를 복원시켰으며,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여 척화론을 폈다. 이에 후금은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인조가 이를 거부하자 청은 12만의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침략하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삼전도까지 피란을 갔다가 결국 거기서 청에게 무릎을 꿇고 서른세 번 절을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까지 볼모로 청에 잡혀가게 된다.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벽안의 천주교 신부들과 친교를 맺으며 서양의 학문이나 문물을 접하고 감탄했다. 아버지 인조는 소현세자의 이런 친청(親淸)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아버지 인조에게 서양 문물과 서책들을 내보이며 청나라를 본받는 부국강병을 제청했다. 이에 격노한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집어 던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병으로 드러눕는다. 그리고 와병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나이 고작 34세였다.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시신은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으며 내장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여러 학자들이 인조에 의한 독살을 추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뿐 아니라 그 핏줄까지 모두 제거했다.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는 역도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역병이 창궐하던 제주도로 귀양 보내 위로 두 아들은 죽고 막내아들은 생사불명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직계가 모두 정리된 후,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후사를 이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17대 임금 효종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닌, 왕권과 신권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영조의 눈물어린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 미쳐버린 살인범을 세자로 둔다면 영조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론측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2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인조가 소현세자와 그 아들들을 죽인 것도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정치적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력과 정치란 냉혹하고 비정한 것이다.
영조는 숙종의 적자(嫡子)도 아니고 장자(長子)도 아니었다. 이 사실이 영조 정권의 정통성을 계속해서 흔들었다. 사도세자 역시 영조의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었다.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영조의 나이는 이미 42세였다. 그래서 서둘러 세자로 책봉되고 15세부터 대리청정을 세웠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도세자는 노론보다는 소론 측에 기우는 인사를 펼치면서, 제대로 된 탕평책을 펼치며 노론을 견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노론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사도세자를 비방하며 영조에게 갖은 고변을 일러바쳤다. 이때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호되게 꾸짖었는데, 이로 인해 세자는 일종의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게 된다. 게다가 사도세자는 의복에 대한 결벽증세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의복을 책임지는 나인과 궁녀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10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사도세자는 자신이 죽인 나인의 머리를 잘라 손에 들고 궁 안을 배회하기까지 했다. 이를테면 궁궐 안의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이었던 것이다. 이에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일파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 10가지를 상소하였고, 이게 분개한 영조는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한다. 세자가 이에 불복하니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 28세였다.
실록에 정사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아들인 세자를 죽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임금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인조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 즉위했다. 서궁에 유폐돼 있던 인목대비를 복원시켰으며,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여 척화론을 폈다. 이에 후금은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인조가 이를 거부하자 청은 12만의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침략하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삼전도까지 피란을 갔다가 결국 거기서 청에게 무릎을 꿇고 서른세 번 절을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까지 볼모로 청에 잡혀가게 된다.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벽안의 천주교 신부들과 친교를 맺으며 서양의 학문이나 문물을 접하고 감탄했다. 아버지 인조는 소현세자의 이런 친청(親淸)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아버지 인조에게 서양 문물과 서책들을 내보이며 청나라를 본받는 부국강병을 제청했다. 이에 격노한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집어 던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병으로 드러눕는다. 그리고 와병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나이 고작 34세였다.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시신은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으며 내장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여러 학자들이 인조에 의한 독살을 추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뿐 아니라 그 핏줄까지 모두 제거했다.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는 역도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역병이 창궐하던 제주도로 귀양 보내 위로 두 아들은 죽고 막내아들은 생사불명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직계가 모두 정리된 후,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후사를 이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17대 임금 효종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닌, 왕권과 신권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영조의 눈물어린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 미쳐버린 살인범을 세자로 둔다면 영조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론측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2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인조가 소현세자와 그 아들들을 죽인 것도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정치적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력과 정치란 냉혹하고 비정한 것이다.
광남일보 기자 @gwangnam.co.kr